방광이 터질 것 같고
온몸을 물로 적시고 싶지만
유리창 밖의 방대한 성수와도 같은 바다로 뛰어들 수 없다.
호수 앞에 놓여있는 화분을 본 적이 있다.
꽃 한 송이가 저 광활한 일용할 양식을 보고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건
그의 사방을 가로막는 둥그런 울타리 때문만은 아니고
태어나기를 두발 두 다리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려나.
나 또한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모든 세상을 그림의 떡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화면 너머 눈동자 너머 내가 보고 듣는 것들을 쳐다보기만 하며 구원과도 같은 빗물을 받아먹기만 하며.
마치 짝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유쾌한 상호작용을 이루는 자원들을 바라만 보는 이유는 수없이도 많을 테지.
나의 물리적 한계와 심리적 불확실성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나는 시선과 제도아래 저 바닷속에 뛰어들 수 없고
태생적 환경에 따라 가지지 못하는 무한한 자원들이 있다.
그런데 식물의 수동성은 보잘것없어 보이나 세월의 흐름과 협동하여 이루어지는 꾸준함은 무섭다. 아스팔트 속에서도 씨앗은 자라나며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던 단단한 콘크리트와 벽돌도 언젠가는 부식되고 으스러져 뿌리내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해작용이 존재가치일 수 있을까?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까
답답함을 느끼는 식물이 될까
아니, 고통을 마주하는 삶 자체를 즐기는 여행자가 될까.
뭐가 됐든 답답한 프레임 속에서 고집스레
챗바퀴만 도는 삶은 살지 않을 거다, 그게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