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날이다.
오늘은 내가 할 일이 없으니 캠프 내의 안전표지판 등을 닦으라고 했다. 설렁설렁 나무늘보처럼 하나씩 닦아냈지만 그래봤자 한두시간이 지날 즈음 끝날 양이었다.
퇴근까지 남은 8-9시간을 어찌 보낼지, 일을 더 달라고 해야하나 고민을 잠깐 했지만 그만뒀다. 조용히 동료들이 잘 오지 않는 크립룸에 처박혀 간만의 잉여로움을 즐기기로 했다.
새삼 참 숨가쁘게 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취직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헝가리로 유학을 갔다가 예상보다 빠르게 접고는, 또다른 도전을 하겠답시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잠시 머물기까지 고작 7년. 그리고 계획보다 빠르게 호주에 와서는 투잡을 뛰고 있는 게 근황이다.
이렇게 요약해서 써놓고 보니 꽤나 정신사나운 인생이다. 충분히 그 어렵다는 평안하고 평범한 삶을 살수 있는 환경을 가졌건만, 굳이굳이 힘든 길을 가려 한다는 부모님의 말에 반박하긴 그른 것 같다. 언제부턴가 가슴 깊이 새긴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신조가 인생이 걸린 갈림길에서 대부분 도전을 선택하게 만든 탓이다.
지금의 삶도 만족하고 있고 늘 궁금해 하던 호주에서의 생활도 나와 잘 맞다고 느낀다.
누군가 외국인이란 신분은 양날의 칼이라고 했다. 누구도 나를 모르기에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에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지만, 정착하고자 하면 평생 자신이 결국 이방인이란 걸 느끼게 될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난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산 20몇년의 시간동안, 화목한 가족과 의좋은 친구, 안정적인 직장, 사랑한다 말해주는 연인 등이 있음에도 늘 어딘가에 떠다니는 부표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편리했던 내 나라에서의 삶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이나 호주나, 어짜피 삶의 대부분은 행복한 날보다 힘들고 별반 다를것 없는 평범한 날들이다.
이걸 누군가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하던데, 난 어짜피 대부분 힘들 인생이라면 회복이 빠른 환경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정착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주는 나에게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단 15분만 차를 운전하면 내게 해방감을 주는 바다가 있고, 고개만 들어올리면 언제든지 볼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이 있는 이곳이 좋다. 늘 주변의 기대와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이를 악물지 않아도 되는 이곳이 좋다. 게으르고 느긋한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란 것을 배우고 내가 애쓰고 노력한 만큼 무언가 돌려받는 이곳이 참 좋다.
(심심하다고 대낮부터 아주 시를 쓰고 있는 내가 웃기다.)
그리하여 한국과 가족도 사랑하지만, 내 삶을 이곳에 뿌리내려보고자 결심한지 어언 4개월차다.
큰 도전이고 삶을 배팅한 만큼 갈수록 혼자서 버티기 힘든 날도 많다. 난 준비됐으니 하루빨리 내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꼭 연인이 아니어도 좋다.)이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나처럼 지금과 미래를 소중히 여겨줄 사람이 날 사랑해주길 바란다. 욕심히 과할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이렇게 살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이정돈 괜찮지 않을까 싶다.
힘내자. 오늘도 내일도 버텨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