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길어진 저녁이면 어쩐지 발걸음도 조금씩 느려집니다. 특별한 약속도, 서둘러 가야 할 곳도 없는 날이면 잠시 이어폰을 빼고 천천히 걸어보곤 하는데, 하루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오래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연병장 너머의 노을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내일도 같은 하늘이 펼쳐질 것이라 믿었기에 굳이 걸음을 멈춰 오래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같은 풍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너무 익숙한 것은 굳이 기억해 둘 이유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시간이 이만큼 흐른 지금은, 서울에서 마주하는 어떤 저녁보다도 그 시절의 노을이 훨씬 선명하게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전역한 지 꼬박 일 년 하고도 한 달이나 흘렀는데, 얼마 전에 또 군대 꿈을 꾸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훈련 상황에 허둥지둥 전투복을 챙겨 입고 장구류를 결속한 채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뛰어가던 참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지요. 휴대폰 화면 상단의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몸은 오래전에 부대를 떠났음에도 기억은 여전히 그 시절을 현재형으로 다시 살아내는 모양입니다.
군에서의 시간은 참 더디게 흘렀습니다. 기상나팔 소리에 몸을 일으키고 아침점호를 받은 뒤 정해진 일과를 마치면 어느새 저녁점호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하루하루는 놀라울 만큼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오늘을 살아낸다기보다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고, 언젠가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흘러가는 하루하루에는 좀처럼 마음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때 휴가를 나올 때면 첫 행선지는 늘 서울이었습니다. 집은 수원이었지만 일부러 서울행 표를 끊었던 것은, 그 도시가 제게 자유라는 단어를 가장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전역 후에는 이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용산역 플랫폼을 빠져나와 도시 특유의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특별한 목적도 없이 걷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어디를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잠시나마 군인이 아니라 평범한 스물한 살의 청년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대로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군에서의 기억도 자연스레 멀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거나 하늘 끝으로 노을이 번져갈 때면, 그 시절의 평범했던 하루가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마음을 붙드는 것들은 대개 거창한 장면들이 아닙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올려다보던 겨울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때는 너무 익숙해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장면들입니다. 내일도 같은 하루가 이어질 것이라 믿었기에 오래 담아두지 않았던 그 순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가장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시간은 분명 끝이 났는데도 좀처럼 끝나지 않고, 어떤 풍경은 그곳을 완전히 떠나온 뒤에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 삶은 늘 이런 방식으로 기억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특별했던 날들은 특별했다는 사실만 남긴 채 조금씩 멀어져 가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저마다의 의미를 품어냅니다. 무심히 흘려보냈던 풍경이 어느 날 문득 삶의 한 모퉁이를 지탱하고, 그저 견디기만 했다고 믿었던 시간은 어느새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견고한 뿌리가 되어 있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시간을 이해하게 되고, 떠나온 뒤에야 그 평범했던 하루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해가 질 무렵이면 예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걷습니다. 무심히 지나쳤을 하늘 앞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붉게 물드는 구름을 한동안 바라보곤 합니다. 언젠가 오늘 역시 돌아보고 싶은 한 시절의 풍경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오래 바라보지 않았던 노을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처럼, 오늘의 하늘 역시 언젠가는 오래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무거운 하루를 견뎌내셨을 당신에게 이 작은 문장들이 조용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평범한 모든 순간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를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