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서울[ 로그인 ]
블라블라
← 게시판으로

[기타][1편]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글쓴이 2026.07.23 13:17조회 156#0642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소리는 늘 비슷한 리듬으로 떨어지는데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처럼 들립니다. 어떤 날에는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처럼 느껴지다가도, 기분이 퍽 괜찮은 날에는 듣기 좋게 다가옵니다. 그런 날이면 창문을 느슨히 열어두고 한동안 창가에 가만히 서 있고는 하는데, 그러다 보면 좋은 기억 하나가 문득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

지난 6월에 교토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본의 6월은 원래 비가 흔한 계절이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던 터라, 캐리어 한쪽에는 우산을 미리 챙겨 넣어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일기예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여행을 앞두면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무모한 낙관에 기울어지고는 하지요.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

그날의 하늘은 온종일 무언가를 품고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먹구름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으나 쉽게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예정대로 니넨자카와 산넨자카의 돌길을 향해 차분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

여행지에서는 늘 그렇습니다. 평소였다면 목적지를 향해 최단경로로 곧장 걸었을 터인데,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진열장 너머에 놓인 작은 찻잔을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름도 모르는 골목 안을 괜히 한 번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목적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의 순간들도 한결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

산넨자카를 거의 다 올랐을 무렵,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요란스레 쏟아지는 비도 아니었고,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야 할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우산을 펼쳐 들면 그대로 걸어갈 수 있는, 그렇지만 풍경의 채도를 바꾸어 놓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비였습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이던 돌길은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우산이 하나둘씩 펼쳐졌고, 젖어 든 돌계단은 아까보다 짙은 먹빛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기와지붕 끝자락으로는 가느다란 빗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처마 밑에 걸음을 멈추어 선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

잠시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그냥 계속 걸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우산을 고쳐 쥐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본 택시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굳이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숙소가 있는 기온시조역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어차피 여행이라는 것은 많이 걷기 위해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요.

​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내면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빗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걸었습니다. 비에 젖어가는 골목의 풍경이 퍽 아름다웠습니다. 걷는 동안 운동화 앞코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바짓단도 무거워졌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젖기 시작한 운동화를 걱정하는 일보다, 비에 젖은 골목의 풍경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이 그날의 나에게는 훨씬 중요했으니까요.

​

한참을 걷다 보니 관광객보다 퇴근길에 오른 현지인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우산을 든 채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더군요.

​

숙소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비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옷은 군데군데 젖어 있었고, 운동화는 하루 종일 길 위를 누빈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들어가 하루를 마감하기에는 미련이 남았습니다. 발걸음을 그대로 거두어들이기에는 아직 하루가 덜 저문 것 같았습니다.

​

그리하여 숙소 뒤편의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간판 불빛 몇 개가 젖은 아스팔트 위로 길게 번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작은 선술집 한 군데가 시선에 들어와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딱히 유명한 맛집도 아니었으며,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있는 가게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이름은 잘 모릅니다. 그저 문틈 사이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온기에 이끌리어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

우산을 접어 입구 한쪽에 가지런하게 잘 세워 두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가게 안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몇몇 손님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테이블마다 놓인 철판 위에서는 반죽이 익어 가는 자글자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코노미야키를 한 접시 주문했습니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반죽이 익어 가는 냄새를 맡으며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

음식을 다 먹고 밖으로 나오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으나, 빗줄기는 아까보다 한결 가늘어져 있었습니다. 우산을 다시 펼쳐 들고 숙소까지 남은 길을 걸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젖은 운동화를 벗어 가지런히 정돈해 두고, 테이블에 앉아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를 한동안 조용히 들었습니다.

​

여행날의 저녁은 언제나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숙소에 돌아와서 그날 걸었던 길을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복기했는데, 우산 끝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나 골목 모퉁이에서 스쳐 지나간 풍경 같은 것들이 뒤늦게 마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루는 이미 지나갔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못내 아쉬워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곱씹은 모양입니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난 날은 아니었습니다. 비가 내렸고, 오래 걸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식당에서 맛있는 오코노미야키를 한 접시 먹었을 뿐입니다.

​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문득 지난 6월의 교토를 떠올리곤 합니다. 운동화 앞코는 조금 젖었고, 바짓단도 축축했습니다. 그럼에도 참 좋았습니다.

​

비 소식이 자주 찾아오는 여름의 한복판입니다. 당신이 거하고 계신 곳에 안온함이 깃들기를 마음 담아 빌어봅니다. 지나가는 비에 마음 흔들리지 마시고, 부디 어디서든 잘 계십시오.

받은 응원002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기려면 [ 로그인 ]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