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사람이라는 존재보다 관계의 구조를 먼저 따져보는 특성이 있다. 상대를 좋아하고 나서 미래를 고민하는 보통의 방식과 달리,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 관계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먼저 가늠해 본다. 미래의 가능성과 위험 요소를 먼저 계산하기에, 누군가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일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진정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무기한의 의무이다. 연락이나 관계 유지가 싫다기보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의무감으로 묶여 매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다. 그렇기에 나는 차라리 기한이 정해져 있거나, 언제든 서로의 의사로 종료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 서로 연장을 선택하는 관계의 구조를 상상하곤 한다.
그 배경에는 '한 사람의 감정까지 내가 다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부담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별의 순간에 상대가 깊이 상처받고, 내가 괜한 미안함과 죄책감 속에 사로잡히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관계가 끝나는 것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죄책감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슴 아픈 마침표 대신, "그동안 고마웠어"라는 깔끔하고 따뜻한 인사로 끝맺을 수 있는 관계를 소망한다.
이러한 관계관을 되짚으며 '내가 혹시 이기적인 건 아닐까?' 스스로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상대를 이용하거나 내 편의만 챙기려는 것이 아니다. 내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상대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주고 싶어 하며, 서로가 동의한 규칙 속에서 억압 없이 솔직해지기를 원할 뿐이다. 굉장히 자기방어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아직 깊은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세운 나의 가치관이자 가설이다. 실제로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게 된다면 지금의 원칙과 구조보다 감정이 훨씬 앞서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가능성 역시 기꺼이 인정한다.
시간과 끝에 솔직하며,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진심인 관계. 이것이 내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