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기의 지구촌은 지속적인 발전을 통하여 전례 없는 생활 수준과 문명을 일구어낸 사회이다. ‘삶’이라는 가치는 단순히 목숨의 부지가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심미적 적합성이 추가되었으며 계급이라는 족쇄가 사라진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당당히 부르짖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곳곳에서 전례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땅히 해결할 수 있는 방책 역시 쉽사리 제안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삶의 수준은 타 시대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나아졌고 타인과의 상호작용 역시 굉장히 쉬워졌는데 어째서 우리는 도리어 자신을 비관하고 남아 있는 생을 지겨워하며 외로움에 발버둥을 치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역설적으로도 문명의 발달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 인류사는 숱한 전쟁과 4번의 산업혁명을 거치며 가히 눈부신 성장을 이룸과 동시에 도태라는 두려움을 그림자처럼 끌고 오게 되었다. 더 나은 세상으로의 발걸음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핏빛으로 점철된 정복과 함락의 역사가 남들보다 늦고 뒤처지는 일이 곧 생존의 문제로 직결됨을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마음속에 조바심과 불안함이라는 악을 심게 되었으며 타인과의 비교와 짓밟아 올라가야 한다는 사회 풍조가 일종의 선으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회 분위기가 특징적으로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0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속에서 가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만한 발달을 이룩했기에 우리가 뼈저리게 실감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사회의 변화는 동시대에 각기 다른 고통을 겪은 세대를 몰아넣는 꼴이 되었으므로 흔히들 ‘세대갈등’이라 지칭하는 사회적 악이 자연스레 녹아들게 되었다. 세대뿐만 아니라 급박히 변화한 사회 분위기에서 정치, 성별, 종교의 다름이 극단적으로 나뉜 현시대는 타인을 미워하여 밀어내면서도, 이해받지 못해 외로워하는 우리 인류를 만들어냈으며 우리는 끝내 두 모습의 모순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휩쓸리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이렇듯, 양날의 검이 된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는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도입된 기제이다. 효율의 사전적 정의는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재료, 에너지, 노력, 돈 및 시간 낭비를 방지하는 측정 가능한 능력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낭비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인데, 이는 물질적 성질에 어울리는 단어의 조화이다. 열역학적 공정에서 효율을 따짐이라 함은, 일로서 자행되어야 할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빠져나가게 되어 목표한 공정 설계를 만족할 수 없게 됨을 뜻한다. 효율은 한정된 자원을 지닌 상황이거나 비용의 한계가 걸려있는 ‘물질’의 경우 가장 우선시 되는 사항이지만, 현시대 인류는 인간에게도 이러한 평가 기준을 적용하여 낭비의 방지라는 가혹한 단어들을 들이밀며 타인을 비롯한 스스로에도 벌에 가까운 채찍질을 범한다. 끝내 우리는 타인을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영위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을 이 사회의 효율을 위하여 억지로 맞물려가는 톱니바퀴쯤으로 가치 하락에 일조하며 고통받는 것이다. 무언가의 부품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분명 안정적 일수도,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확립되고 주체성을 지닌 자유 시민으로서의 인간이라면, 분명 위와 같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본인의 삶은 그저 지루하게 흘러가는 다큐멘터리 필름 속 일부일 뿐이라는 수치스러움에 몸부림치게 되어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즉, 효율성이라는 질 낮은 기준으로 곁에 머문 타인을 비롯한 인간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인간 삶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 암시했던 타인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에게 지옥일 수도, 레비나스의 말처럼 구원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곁에 존재하는 가족, 친구, 이웃에게 어떠한가? 그들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따지지 않고도 머물게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은 곧 나 자신이 타인에게 지옥인가 구원인가라는 물음에 다다른다. 우리는 타인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단순히 언어적 위로를 전하며 안타까움을 내비치는 데 멈춘다. 동시에 고통의 주체가 내가 아님에 감사함을 느끼는 오만한 본인의 모습 역시 은연중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본인 삶에 집중하고 생존을 위해 애써야 함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 자체는 무작정 배척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맞서야 하고 떨쳐내야 하는 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안일함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한참 유행했던 단어로 ‘누칼협’이라는 표현이 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라는 뜻의 이 줄임 표현은 고통받는 상황에 놓인 타인에게, 그 상황에 놓이라고 누군가 등을 떠밀었냐는 식의 극단적인 비웃음이다. 본 단어 사용의 기저에는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으며 타인의 정확한 사정을 알려 하는 일말의 노력조차 없는 인간의 오만함을 내비친다. 하지만 정녕 우리는 타인이 겪는 고통에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존재하는가? 타인에게 지옥이 되었던 개인은, 과거에는 가볍게만 여겼던 나락의 무게를 실감하며, 또 다른 타인을 구원으로 삼고자 하는 이중성을 지니지는 않는가? 한 치 앞도 모른 채 타인에게 결코 ‘구원’이 되어주지 않았던 개인이 타인을 구원으로 여기는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리석음을 여과 없이 보이는 사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간단히 줄인 말들이 유머로 소비되고 다수가 당연하듯이 여기는 만큼 우리 사회는 병들어 가고 있으며 사회적 악이 만연해짐을 실감한다.
우리는 위와 같은 고통의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이 물음의 답은 앞서 열거했던 고통의 이유와 매우 근접한 연관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사랑’이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 그 이유는 첫째, 타인을 미워하면서도 이해받고 싶은 모순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효율성을 일절 따지지 않고도 나 자신의 진정된 모습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곁에 둘 수 있는 용기는, 타 이유로는 근거의 각주를 달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어야 납득 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는 단번에 인간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셋째, 내가 타인에게 구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랑으로서 구체화 되고 결국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는 명분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얼어붙은 사회 분위기에 훈풍을 불어넣고 사랑이라는 충만함을 채워 넣을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의 사랑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 타자는 곧 나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되뇌어야 한다. 인간은 본래 나라는 존재 이외에는 고려할 수 없는 사고 회로를 지녔으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들끓어 오르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의 바운더리가 타인에게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나는 곧 너라는 인식을 우리의 뇌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확장의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철저히 이기적임에도 연민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자기 확장이 일어남을 주장하며 자기(self)가 타자에게 확장되는 경험을 사랑과 연민의 근거로 둔 것이다. 그에 말에 따르면 타자는 곧 나라는 생각의 기초가 되는 사랑은 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은 타인을 사랑함을 통하여 자기감정을 확정시킬 수 있다 하였다. 그에 말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직접 느끼지 못하나, 상상과 공감을 통해 타자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확장하며 이 과정에서 사랑과 공감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심리학자 Arthur aron은 Self-Expansion Model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사랑은 자기(self)의 경계를 타자에게까지 확장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저명한 세 학자의 말을 토대로 ‘타인은 곧 나’라는 2인칭의 관계 부여를 통하여 나라는 존재의 지평을 타인에게까지 넓힐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공감과 연민, 타자가 겪은 고통의 이해는 사랑이라는 감정하에 충실히 수여되는 임무의 일종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곧 나 자신의 고통처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개개인이 그저 사회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그들 각자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나만 아니면 돼’라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우리 개인이 타자의 구원이며 더 나아가 스스로 구원에 대한 질문의 답이 되어 본인의 고통을 충실히 아파하고 건강하게 풀어낼 수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를 통하여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건강한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충실히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적 건전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기대한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타인의 존중이다. 작금의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사소함 불편함마저도 참고 견디는 것보다 해소하기에 급급해 왔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 물질인 분자의 성질도 각기 다르기에, 각 분자는 타 분자에 맞추어 본인의 성질을 일부 망가뜨리기도 하고 결합을 변형시키며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이 우주를 구성하고 지탱하였다. 그러나 우주가 지닌 수천억 년의 시간 중 빛이 반짝일 만큼의 순간에 머무를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그에 걸맞은 존중도, 찰나의 찰나를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에게 느끼는 연민도, 우리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을 나 자신이라 여기면서도, 결국에는 완벽히 같을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존중을 보여야 한다. 설령 그것이 우리에게로 하여금 불편함을 일으켜도 말이다. 참된 나는 결코 나를 세우기 위해 너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우리 속에 함몰시키지도 않는다. 단지 우리 속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며 서로에게 2인칭의 가치를 지니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사랑하는 방법과 받는 방법의 끊임 없는 탐구이다. 사랑은 존재를 선물하는 행위이다. 이 감정은 본질적으로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는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을 뜻한다. 사랑의 진정한 모습은 나의 세계를 고집하고 나의 생각, 욕망을 타인에게로 확장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춰가며 상대가 원하는 자리에 가 있으려고 노력하고 서로가 상대에게 그와 같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은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며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 선물과도 같은 경험으로 나 자신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사랑하는 존재로 인해 나의 존재에 야기 되는 고통의 상황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현세대 인류는 발달 된 문명과 함께 타인에 대한 불신과 미움을 교육받고 자란 세대이다.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곧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에게 상처를 받는 것 역시 우리가 되었다. 하여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로 발생하는 고통은 필연적임을 인지하며 방어기제를 조금씩이라도 벗어내야 한다. 마음속 공간에 사랑이라는 여유 하나쯤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놓고, 다가오는 타인을 환대하며 반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인의 존재가 자신을 망가뜨리고 헤집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사는 내내 해야 하며, 온 생을 걸고 사랑을 해야 하는 형벌에 처한 존재라 하고 싶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 사랑의 형태는 가히 ‘애’愛라 불릴만한가. 삶을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타인의 존재에 괴로워하고 갈급함에 빠질 때면 우리는 맹렬히 이 기본 전제를 고민하고 다듬어야 한다. 나는 타인의 사랑을 기꺼워할 수 있는지, 나의 사랑이 타인에게 기꺼운지. 그리하여 나라는 인간이 진정으로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랑의 대상에 존재의 전부를 바치게 된다면, 그 사람에 대한 고통을, 더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의 고통을 당연하다는 듯 함께 짊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은 자, 고통에 처할 것이다. 필자의 이 말은 단순한 저주가 아닌, 사랑을 잊은 현세대 인류에게 보내는 공감과 연민을 담은 염려이다.
대학교 과제였는데 한 번 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