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많은 죄목을 붙여 주었다. 내가 지닌 타이틀 때문이었다.
기혼녀. OO 엄마.
이것들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배신자, 정체성 모르는 괴물, 약속 어긴 자’라고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리며 죄명을 썼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현실과 내 죄목과 함께 스스로 윽박지르며 살아왔다. 간혹 캄캄한 밤에 SNS를 통해 그 세계를 엿보고 잠시 마음이 들끓다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다시 깊은 곳에 숨기도 했다. 혹시 티 날까 봐, 누구에게 들킬까 봐 현실과 그 세계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스스로 격리해 전전긍긍하며 내 역할을 감수했다.
세상 사람들이 성 취향에 따라 ‘레즈, 바이, 이성애자’로 분류된다. 단지 성별 하나로 사랑의 가치관을 판단하려고 한다. 이런 거대한 명목 앞에서 나는 무엇일까?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어서 인터넷에서 정의를 찾는 과정에서, 내게 또 다른 타이틀이 주어졌다. ‘바이’구나.
‘두 개 이상의 성별에 대해 성적 또는 낭만적 끌림을 느끼는 성적 지향.’
읽고 나서 자기검열을 시작했다. 그럼,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면, 성적 끌림과 감정적 끌림의 배분율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난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었고 어떤 끌림을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 당시에 어떤 성적 또는 낭만적 끌림도 없었다. 그 여자가 풍기는 섬세함과 온유함에 마음이 요동쳤던 것이었다.
따뜻한 손길, 말 속에 어린 진심, 가짜가 없는 표정.
‘바이’를 정의한 짧은 문장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특징들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하고 온유한 결을 가진 사람,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니어도 끌림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몸과 감각이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묶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또는 자신이 그 분류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게 하는 타이틀 아래에서 허영, 자만, 압박, 무력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변화를 겪는다. 나는 과연 표준화된 명목 아래에 있는 이름들이 지닌 불평등한 의미를 통해 나 자신을 실현해야 하는가. 성 취향이라는 타이틀 안에서, 다양한 결을 지닌 개인의 유동성을 배제한 채 가장 구별하기 쉬운 범주인 ‘성’으로, 한 개인의 ‘취향’을 엮어버리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만약 이것이 사회에서 정해진 약속과도 같은 것이라면, 나는 먼저 나 자신을 거기로부터 잡아끌어 내고 싶다.
나는 여전히 내 결을 선호한다. 오렌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지 ‘그게 오렌지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사과를 좋아하는 이유와 오렌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같을 수도 있다. 냄새가 상큼해서, 맛이 새콤달콤해서, 씨가 별로 없어서일 수도 있는 것처럼 대뜸 오렌지를 좋아하는 사람,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섣불리 범주화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내면의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의 섬세한 결들을 지켜내며 사랑할 수 있어서 좋다. 그게 가장 나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