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영화를 참 좋아해서 영화과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살았습니다. 입시 요강이나 기출 문제를 몇 번이고 찾아보며, 내가 연출한 영화가 이름 모를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내 이름 석 자가 찍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수줍게 무대로 걸어 나가 수상 소감을 전하는 풍경을 마치 정해진 미래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보곤 했지요.
그때의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꽤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영화와는 동떨어진 대학에 왔고, 그 시절 그토록 바라던 스크린 뒤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의 내가 그리 싫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던 삶의 모양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생겼지만, 이제는 그 차이를 예전처럼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마음이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세 번이나 보았습니다. 마지막 관람 때는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상영관을 빠져나간 뒤에도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불이 꺼진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어쩌면 영화과라는 학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생각해보면 나는 좋아하는 것을 너무 쉽게 미래의 직업으로 바꾸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미래에는 늘 특정한 목표가 붙어 있었고, 그 목표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내가 원하던 삶을 살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니 영화과에 가야 하고, 영화과에 가면 영화를 만들어야 하고, 영화를 만들면 언젠가는 영화감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가지 않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만나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마음에 남는 장면은 며칠이 지나도 문득 떠오르며,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간을 비워 극장에 가기도 합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그때 정말 원했던 것은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이나 영화과 학생이라는 이름만은 아니었다는 것을요.
나는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가 없는 하루보다 영화가 있는 하루를 조금 더 좋아하고, 좋은 영화를 만나면 괜히 마음이 들뜨고, 마음에 드는 장면 하나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요.
그래서 이제는 예전의 나를 떠올릴 때 조금 덜 미안합니다. 영화과에 가지 않았고, 내가 만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간 적도 없지만, 그때의 내가 좋아했던 것은 아직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가끔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네가 생각했던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네가 좋아했던 것은 아직 좋아한다고. 네가 그렇게 열심히 찾아보던 영화들은 여전히 내 하루에 들어오고 있고, 여전히 어떤 영화는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보고 있다고. 그 말을 들으면 그때의 나도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을까요.
요즘은 그래서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예전만큼 열심히 상상하지 않습니다. 몇 년 뒤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는 아직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빈칸이 조금 불안했지만, 이제는 꼭 미리 채워둘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나는 내가 생각했던 곳과는 다른 곳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지금 좋아하는 것이 언젠가 내 일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오래된 취향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이든 그것을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도 한동안은 그냥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다음에 무엇이 될지는 조금 뒤에 생각해도 될 테니까요. 예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먼저 정해놓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의 나를 바꾸려고 했다면, 이제는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 바라보다가 그 끝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를 보고 싶습니다. 내가 꿈꾸던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내가 사랑했던 것을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과거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몰랐던 이 삶도 제법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한때 바라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곳에 서 있는 어느 날, 지금까지의 시간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순간이요. 오래 좋아했던 것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새로운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것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 어느새 삶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지금 당신의 마음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조금 더 좋아해보세요. 그것이 어디로 데려다줄지, 언젠가 무엇이 될지는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좋아서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당신이 걸어온 길이 처음 생각했던 모양과 조금 다르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 길에는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던 사람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음도, 생각보다 오래 좋아하게 된 것들도 함께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때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을 바라보며 조금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이었겠지요.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의 삶이, 언젠가 당신에게도 제법 마음에 드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글을 어떻게 이렇게 잘 쓰시는거예요ㅠㅠ 어릴때 하고싶은 꿈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영화과를 꿈꾸며 입시요강과 기출문제를 찾아보며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꿈에 대한 열정을 다했던 모습이 부럽고 멋있는 것 같아요! 제 꿈을 못찾은 상태에서 글을 읽으니 뭔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