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기억 까마득한 저편에서 살며시 문을 열고 찾아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까맣게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어릴 적의 작은 소망이나,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마음들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지나간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가볍게 넘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계절을 거듭해 나가면서 그 마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길은 그저 키가 자라고 나이를 먹으며 몸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어린 날의 나를 다정하게 둘러보고 챙겨주며 함께 자라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사건들보다 그 사이를 채우고 있던 이름 모를 마음들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은 늘 너무 크게 느껴졌고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마음에 품은 것들은 많았지만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볼 힘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들은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한 채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묻혔습니다.
자라나면서 그런 마음들은 자연스럽게 잊혀가는 듯했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고, 해야 할 일을 해내고, 눈앞에 놓인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전의 나를 돌아볼 틈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의 내가 다시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한참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마주했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기도 하고, 오래전 좋아했던 것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의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요. 지나간 시간의 틈 사이로 어린 시절의 내가 고개를 내밀면, 그제야 잊고 있던 마음들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들을 하나씩 돌아보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무엇을 바라며 살았는지도 조금씩 떠오릅니다. 정성껏 마음을 쏟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 망설였던 일들, 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지만 상황에 밀려 뒤로 미뤄두어야 했던 수많은 다짐들. 그때는 너무 작고 힘이 없어 마음을 챙길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다릅니다. 내가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만큼 자랐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힘도 생겼습니다. 어린 시절의 마음들을 더 오래 외면하지 않고 하나씩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꼭 거창한 일일 필요는 없을 터입니다. 까닭 없이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따라가 보고, 어릴 적 감히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마주하고 싶습니다.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꺼내어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렇게 하나씩 마음을 살펴가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너무 멀고 어려웠던 일들이 이제는 조금 가까워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마음을 지금의 내가 이어갈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입니다.
남들의 눈높이나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느라 바쁘게 살다 보면 정작 내 안의 진짜 목소리를 놓치기 쉽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길을 걷고 있어도 내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것들을 하나둘 잊어버리고 있다면 마음 한구석에는 자꾸 빈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반대로 남들에게는 소박해 보이는 선택이라도 내가 오래 마음에 품었던 것이라면 그 선택은 생각보다 오래 나를 지켜줄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을 기억하고 내 안의 어린 나와 나누었던 순수한 약속을 하나씩 지켜나가는 일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진짜 성장이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내가 품고 있는 고민과 꿈, 소소한 생각들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남겨두려 합니다. 언젠가 그것을 읽게 될 미래의 나를 위해서입니다. 요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일 앞에서 마음이 설레고 무엇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는지 하나씩 적어두고 싶습니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정확히 기억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지금의 내가 어떤 하루를 살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미래의 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해 두려 합니다.
노트 위에 차분히 적어 내려간 오늘의 문장들은 어쩌면 먼 훗날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30대의 내가 이 글을 펼쳐볼 것이고, 또 한참 뒤에는 40대의 내가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겠지요. 어쩌면 지금의 나를 조금 우습게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너무 쉽게 지나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며 지금의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천천히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멀게만 보이는 꿈이라도 미래의 나에게는 조금 가까운 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내가 그토록 해보고 싶어 했던 일이 이것이었구나, 하며 하나씩 이루어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지나온 날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다가올 날의 나는 모두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습니다. 어린 날의 내가 씨앗을 심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 싹을 가꾸고, 미래의 나는 그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갈 것입니다. 어린 날의 내가 품었던 작은 소망이 지금의 나에게 닿고, 지금의 내가 남겨둔 문장이 미래의 나에게 다시 닿는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참 아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글은 지금의 나를 위한 기록이라기보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남겨두는 징검다리입니다. 언젠가 길을 잃거나 마음이 지치는 날, 이 글을 펼쳐보며 지금의 내가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다시 기억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날의 나에게서 건네받은 마음을 지금의 내가 잘 간직하고, 지금의 내가 남겨둔 마음을 미래의 내가 다시 이어가는 삶을 꿈꿉니다. 나라는 사람의 시간이 어느 한 순간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지금의 내가 품은 작은 소망들을 정성껏 가꾸어 나가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쯤 있었으면 합니다. 꼭 대단한 꿈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갖고 싶었던 작은 물건일 수도 있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 품고 있었던 마음일 수도 있겠지요. 문득 그런 것이 떠오르는 날에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한때의 나를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옛날에는 너무 작아서 알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는 조금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의 마음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장 이루지 못하는 꿈이라면 잠시 곁에 두어도 괜찮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천천히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다만 언젠가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 마음 한구석에 잘 남겨두셨으면 합니다. 훗날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이 남겨놓은 작은 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그렇게 하고 싶어 했구나 하고 웃으며 그것을 이루어주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