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9월이 끝나면 깨워달라는 그린데이의 노래를 매년 8월의 끝자락에 다시 찾아 듣습니다. 아직 9월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9월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노래를 듣고 있는 셈이지요.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8월의 마지막 날들이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찾게 됩니다. 9월이라는 말만 들어도 여름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뒤에 찾아올 계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직 낮에는 햇볕이 뜨겁고 반팔 차림으로 집을 나서지만, 마음은 벌써 조금 앞서가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우선 가을 옷부터 하나 장만하고 싶습니다. 올해는 어쩌다 빈티지 숍에 푹 빠져버렸는데, 가을이 오면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닐 일이 많아질 듯합니다. 요즘 특히 눈여겨보는 것은 1950~60년대 미 육군 야상을 모티프로 만든 제품입니다. 새 옷처럼 반듯한 것보다는 오래 입어 색이 자연스럽게 빠지고, 소매나 주머니 같은 곳에 조금씩 세월이 묻어 있는 옷을 좋아합니다. 빈티지 숍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무엇을 사겠다고 마음먹기보다는 옷걸이를 하나씩 넘겨보면서 안쪽까지 살펴볼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야상을 발견하면 입어보고 거울 앞에 한참 서 있겠지요.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소매를 한 번 접어보고, 주머니에 손도 넣어보고, 안쪽에 붙어 있는 택도 들여다볼 겁니다. 결국 벗어서 다시 걸어놓고 가게를 나왔다가, 한참 고민한 뒤 다시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고른 야상을 처음 입고 집을 나서는 날을 벌써부터 한 번씩 상상해봅니다. 아마 별것 아닌 일인데도 꽤 설렐 것 같습니다.
그 옷을 입고 날씨가 선선한 거리를 오래 걸어보고 싶습니다. 여름에는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서 어디를 가든 가장 빠른 길부터 찾게 되지만, 가을에는 조금 돌아가도 괜찮겠지요. 한 정거장 먼저 내려 평소에는 지나치지 않았을 길을 걸어보고, 지도를 보다가 처음 보는 골목이 나오면 괜히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볼 생각입니다. 종로를 걷다가 집에 들어가기 아쉬우면 소월길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좋겠습니다. 버스를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을 굳이 걸어서 가고, 걷다가 마음에 드는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보기도 하겠지요. 별것 없는 골목인데도 왠지 마음에 들면 한동안 서서 구경하다가 다시 걸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여름에는 집과 지하철역과 카페 사이를 최대한 짧게 오갔다면, 가을에는 그 사이에 조금쯤 쓸데없는 길을 만들어두고 싶습니다.
공원에 갈 때면 책 한 권을 챙겨가려고 합니다. 경의선숲길이나 효창공원에 가서 햇볕이 너무 세지 않은 벤치를 하나 골라 앉아 있을 생각입니다. 가져온 책을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겠다는 무모한 욕심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스무 페이지쯤 읽다가 같은 문장을 두 번 읽을 수도 있고, 옆에서 강아지가 지나가면 책을 덮고 한참 바라볼 수도 있겠지요. 읽던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오기도 할 겁니다. 그러다 날씨가 좋으면 책을 옆에 내려놓고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두 시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읽은 페이지를 세어보면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을 테지만, 굳이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많이 읽기 위해 공원에 가는 것보다는, 책을 읽다가 딴생각을 할 수 있는 오후를 보내고 싶습니다. 책을 읽으러 공원에 가는 건지 공원에 가기 위해 책을 챙기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오후면 충분합니다.
따뜻한 커피도 기다려집니다. 자고로 필터커피란 따뜻하게 마셔야 그 풍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따뜻하게 마셔보고 싶었는데, 여름에는 더위에 항복해버린 나머지 매번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받아들고야 비로소 살 것 같았으니까요. 날이 조금 선선해지면 드디어 따뜻한 필터커피를 마셔볼 수 있겠지요.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너무 뜨거우면 잠깐 내려놓고, 조금 식으면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셔볼 생각입니다. 여름에는 얼음이 녹기 전에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금세 비워버렸다면, 가을에는 커피가 식는 것까지도 그냥 두고 싶습니다. 컵 안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는 것을 굳이 재촉하지 않고,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모금 마시는 식으로 천천히 마셔보고 싶습니다. 커피를 특별히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커피도 계절이 달라지면 마시는 속도부터 조금 달라질 듯합니다.
가보지 않은 카페를 찾아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이나 지도에서 괜찮아 보이는 곳을 찾아보고, 마음에 들면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날 문득 그곳으로 향합니다. 저장해놓고도 몇 달째 가지 않은 곳들이 꽤 있으니 가을에는 하나씩 꺼내볼 작정입니다. 일부러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좁거나, 음악이 너무 크거나,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뺏겨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일단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아볼 겁니다. 마음에 들면 다음에 다시 오면 되고, 별로였다면 다음 카페를 찾아보면 되니까요. 지도에 저장해둔 카페 하나를 찾아갔다가 근처에 또 괜찮아 보이는 곳을 발견하면 계획을 바꿔 그곳까지 걸어가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하고, 커피를 다 마신 뒤에도 한참 앉아 있게 되는 날이 한 번쯤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을 하나 발견하면 지도에 다시 저장해두겠지요.
이렇게 하나씩 떠올려보니 내가 기다리는 가을은 별것 없습니다. 야상 하나를 사려고 빈티지 숍 몇 군데를 돌아다니고,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걷고, 공원에 책을 들고 가서는 정작 책보다 사람을 더 많이 보고, 카페에서는 커피가 식는 것도 모르고 앉아 있는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별것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는 일이 좋습니다. 아직 더운 날씨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몇 가지 남아 있다는 것도 싫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가을에 할 일들을 적어두기로 합니다.
마음에 드는 야상을 하나 찾을 것. 빈티지 숍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바로 사지 말고 일단 한 번 벗어볼 것. 가게를 나온 뒤에도 계속 생각나면 다시 들어갈 것. 날씨 좋은 날 한 정거장 먼저 내려볼 것. 목적지가 아닌 골목으로 한 번쯤 들어가볼 것. 경의선숲길이나 효창공원에 책 한 권을 들고 갈 것. 가져간 책을 끝까지 읽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을 두 번 읽으면 그냥 책을 덮어둘 것. 벤치에 누워 한동안 하늘을 볼 것. 따뜻한 필터커피를 주문할 것. 커피가 식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 것. 저장해둔 카페 중 한 곳을 아무 이유 없이 골라 찾아갈 것.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하면 다음에 앉을 자리까지 기억해둘 것.
아마 몇 가지는 잊어버릴 것이고, 목록에는 없던 일을 더 많이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빈티지 숍에 갔다가 야상 대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셔츠를 사 올 수도 있고, 공원에 책을 가져갔다가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날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평소보다 한참 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도 생길 겁니다. 그런 것까지 미리 정해두지는 않겠습니다.
아직은 8월입니다. 낮에는 여전히 덥고 반팔을 입고 다닙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고, 카페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부터 찾게 됩니다. 가을 옷을 입고 나가기에는 아직 너무 덥고, 공원 벤치에 누워 책을 읽기에도 햇볕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날씨를 확인합니다. 아침저녁 기온이 얼마나 내려갔는지 보고, 며칠 뒤의 날씨도 한 번씩 들여다봅니다. 아직은 낮 기온이 삼십 도 가까이 올라가지만, 어느 날 아침 최저기온이 스무 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보이면 괜히 반가울 것 같습니다. 그날에는 옷장 안쪽에 넣어둔 긴소매 옷부터 꺼내보고, 저장해둔 빈티지 숍의 영업시간도 다시 확인해보겠지요.
첫 번째로 가을 옷을 입고 나가는 날에는 일부러 조금 걸어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길로 가지 않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볼 겁니다.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길을 천천히 걸어보고, 가다가 빈티지 숍이 보이면 괜히 들어가보겠지요. 마음에 드는 야상이 있으면 입어보고, 없으면 그냥 나올 겁니다. 그러다 날씨가 더 좋으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조금 더 걸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공원에 가는 날에는 가방에 책 한 권을 넣겠습니다. 아마 많이 읽지는 못하겠지요. 몇 페이지 읽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책을 펼쳤다가 또 딴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책을 덮어놓고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해가 조금 기울면 그제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카페에 들어가서는 따뜻한 필터커피를 주문하겠습니다. 컵이 뜨거우면 두 손으로 잡았다가 내려놓고, 조금 식으면 한 모금씩 마셔보겠습니다. 커피를 다 마셔도 바로 일어나지는 않겠습니다.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오늘은 조금 더 앉아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앉아 있겠습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골목 하나를 발견하면, 다음에는 저 길로 걸어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갈 겁니다.
아직은 8월이니까요, 조금 더 기다려야겠습니다.
가을이 무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