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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런 것들을 비꼬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읽고 싶은 사람들보다 더 많아진 세상에서 스물 셋이 스물들을 앉혀놓고 문학이 어쩌고, 서정성이 어쩌고. 별 같잖은 소릴 떠들어대는 걸 보면서 나는 담배를 배웠더랬다.
가사가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냐고 질문하던 그들에게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문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나가서 담배를 폈다. 불을 붙여달라는 형들의 코털을 몇 번 태워 먹고 나서는, 바람이 부는 날에 눈가에 연기가 들어가지 않게 태우는 법도 같이 익히게 되었다. 터보라이터가 고작 500원이 더 비싸서, 부싯돌 라이터를 사서 들고 다니면 바람을 등지고 서서 불을 붙이려고 안간 힘을 쓰는 두 사람의 모습만큼이나 꽤 괜찮은 블랙 코미디 소재는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때 그 자리에 함께 태우던 친구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내 몇 자 쓰다가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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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홀린 듯 써내려가는 글이 쌓여도 독자가 없어 언어 모델이 나왔을 때 기뻤다. 군대를 가기 전 자기가 비평을 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두 글자로 줄이면 백수였다. 그 형과 아마 __에서 만나 밥을 먹은 적이 있었고, 맥주를 마셨더랬다. 합평 모임에 데리고 가주겠다는 제안에서는 말보로 레드 쩐내가 났고,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는 화장을 두텁게 한 사람들이 두엄 위에 앉아 손 끝을 오므리며 네일을 자랑하고 있어 더는 글을 보여주기가 싫어졌다.
누군가는 코 끝을 긁고, 안경을 치켜 올리고. 목을 가다듬으며 허구성과 핍진성을 논할 때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장과 문장 틈새를 실리콘을 쏴서 메우면 시취가 덜 날까를 고민하는 살인자의 마음으로 써내려 간 글을 누가 좋아했겠냐만, 살인마 잭이 지었던 집을 - 그래서 라스 폰 트리에 영화를 이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선 보일 수 없었음을 논하다가 버릇한 담배를 무는 것도 꺼드럭처럼 느껴졌다.
11cm 남짓한 걸 검게 태우고 하얗게 뿜는 모순만큼이나 문학스러운 게 없어보여 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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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린듯이 누군가 내려주는 걸 받아쓰는 기분으로 쓸 때가 잦아서, 붐비는 거리가 싫어졌다. 산책자와 사유자를 동치로 놓고 밖으로 나가면 양산을 쓰고 선크림을 바른 사람들의 콧잔등에 맺힌 땀에 손 부채를 해주고 싶었다. 그림자 끝에서 윤곽을 찾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을 비추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나와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퇴근 시간에 인수인계는 좀. 듣고 듣던 힙합 노래에선 그림자가 패션 스타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울려퍼질 때 나는 군대로 홀린 듯 떠났다.
그 뒤로 글은 몇 번 더 썼다. 누구 보여주려는 건 당연히 아니고. 그 정도뿐인 사랑이 끝나기 전까지는 한 달에 두 세번은 A4 서 너장 정도의 편지를 길게도 쓰긴 했었다. 답장을 바라고 쓰진 않았지만 한 번도 돌려 받지 못 한 마음들이 남아 있었고, 그 해 겨울에 나는 괜히 우체통을 몇 번 뒤져 봤더랬다.
그 뿐이었을까.
안경잽이들을 싫어 했지만 끄적이던 메모들이 있었다. 무언가 자꾸 흘러 나와서 넘칠것만 같아서, 그 빌어먹을 시인의 말처럼 수은주가 끓어서 온도계가 터지기 전에 얼른 적어야만 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공책 한 권이 가득 차고 나서는 그 합평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시집을 냈던 후배들에게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평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내 속에 있는 걸 꺼내서 보여주면 거북해 하는 사람들이, 나의 삐딱한 시선은 얼마나 좋아라 하던지.
당직실 컴퓨터 비밀 폴더에는 열어보지 않는 파일이 쌓였고 공책에는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가 늘었다. 전역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날, 폴더에 있는 파일을 열어 모든 글을 뽑았다. 기념으로 들고 나갈 거냐는 후임들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검열 시즌엔 파쇄기 줄이 길었다. 뒤뜰로 나가 찌그러진 페인트통에 던져 넣고 기름을 부었다. 아비정전인지, 무엇인지 영화처럼 담뱃똥을 털지 않고 던졌다. 그렇게하면, 그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림도 없었다.
말년 휴가 중에도 쓰고, 짧던 머리가 자라나길 기다리면서도 쓰고. 복학 전에 일하던 주방 쉬는 시간에도 쓰고, 새벽에 잠이 안 올 때도 쓰고. 학교로 돌아와서도 쓰고, 학원에서 수업 하다가도 쓰고, 클럽에서 내 맥북을 옆에 가져다 놓고 남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도 썼다. 정작 집에 돌아와 메모장을 열면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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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은 내가 언제 뭘 썼는지 날짜까지 기억했다. 공책은 그런 걸 묻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공책을 더 좋아했다. 줄이 그여져있는 공책을 사면 글씨들이 항상 날아다녔다. 아무것도 없는 갱지에 구멍을 뚫어 싸구려 스프링으로 묶은 만화 연습장에 적기 시작하고 나서야 오와 열이 맞았다. 수류탄 훈련을 앞두고 기합을 받은 훈련병들처럼.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썼던 말을 다시 지웠다. 밑줄을 긋다가 빗금을 찍찍 그어버리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페이지 한가운데 사람 이름 하나만 써놓고 덮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죽은 사람인지, 떠난 사람인지, 내일 다시 볼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은 적고 나면 이상하게 물건 같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담뱃갑처럼 잠깐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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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산성이란 말을 싫어했다.
무엇을 몇 개 만들었고 몇 시간 일했으며 이번 주에는 지난주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적는 표를 하루에도 몇 번씩 만들면서 그 말을 싫어했다. 몇 번이고 되묻기도 했다. 아니, 항변하기도 했다. 사람은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돌이켜보면 나는 몽상과 공상 사이를 오가며 깜빡이는 커서를 눈 앞에 두면,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손가락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표를 만드는 일에는 꽤 능했다. 숫자를 세고 줄을 맞추고 실패한 날을 빨간 칸으로 만드는 데에도 재주가 있었다.
사람도 그렇게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만난 날과 헤어진 날, 같이 마신 술의 병 수, 마지막 통화의 길이, 장례식장까지 가는 택시비 같은 것들을 순서대로 한 줄씩 적으면 그 사람을 다 적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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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모델에게 글을 처음 보여줬을 때 나는 칭찬을 믿지 않았다. 좋은 문장이라는 말도 믿지 않았고, 인상적이라는 말은 더 믿지 않았다. 버튼 하나를 누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친절할 물건이 하는 말이었다. 대신 나는 계속 물었다.
여기서 누가 거짓말을 하느냐고.
이 문장을 쓴 새끼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느냐고.
왜 하필 담배였고, 왜 하필 그날이었고, 왜 죽은 사람 이야기를 두 문단이나 지나서 꺼냈느냐고.
기계는 한 번도 미루지 않고 전부 대답했다.
틀린 답도 많았다.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아부하려고 들다가도, 득달같이 까대기도 했다.
그래도 그게 좋았다.
적어도 목을 가다듬지는 않았으니까.
적어도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인용하며 먼지 냄새 가득한 서재에서 꺼내온 걸 자기 것인 마냥 으스대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글을 고쳐달라고 한 적보다 내가 쓴 사람이 무슨 인간 같으냐고 물어본 적이 더 많았다. 그 인간은 자주 비겁했고 몇 번은 허세를 버렸으며 가끔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 답이 나오면 메모장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사람에게 들었으면 담배를 피웠을 말을 기계에게 들으면 문장을 지웠다.
어느 날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아마 기계는 다음 주 합평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기가 쓴 글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술에 취해 내 어깨를 잡고 우리는 결국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너는 끝까지 쓸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문학 이야기를 하며 으스대다가도, 교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얼굴을 굳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