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어 보니 예상대로 당신이 있었다. 당신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미소를 띠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전에 당신 얼굴에 가득했던 근심과 망연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얼굴만 보고 늘 당신의 기분을 유추하던 취미가 있었던지라 파악하기가 쉬웠다. 환기를 하러 바다로 떠난다더니 뭐라도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당신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줄만 알았다. 고적한 내 방에 다시 온기가 돌고, 황폐지에 풀이 돋아나고 생명이 발을 딛듯 내 감정도 다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고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달라진 것은 당신밖에 없었다. 당신의 얼굴을 보면 청산유수처럼 말이 나올 줄 알았고, 우리는 서로가 없었던 공백을 몰아서 채우기라도 하듯 아이처럼 조잘조잘 떠들어댈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먹고,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누워서 뒹굴거리다 섹스를 하고, 껴안고 이야기를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얼굴을 봤지만, 정말 기다리던 당신이 다시 돌아왔지만, 입이 떼지질 않았다. 할 말이 참 많았지만 그 많던 생각과 말은 어디로 갔었나.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당신과의 재회를 수차례 그렸다.
어떻게 운을 띄우고 당신이 어떻게 답할지.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별할지. 수많은 장면 중, 당신과 이별하지 않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었다.
아, 사실 이 길고도 긴 글을 쓰기 전, 그간 당신과 있었던 수많은 일과 우리의 크고 작은 다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글에 담아서 지금보다 훨씬 더 긴 '마라톤'과 같은 긴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미 다 지난날 사랑의 단편이 아닌가. 친구와 다툰 후에 선생에게 달려가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고 쫑알거리는 아이도 아니고, 여럿 앞에서 지난날의 다툼, 어쩌면 과오를 세세하게 서술해 보아야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심적인 이야기만 전달하여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전개하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현관으로. 당신과 나는 서로 한참을 쳐다봤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당신이었다. 잘 지냈느냐는 당신의 그 질문에,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일주일이 되는 시간 동안 고통받았는지도 모르는 당신이 묻는 그 말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너무 다르다 우리는.
다름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사랑의 제1원칙이라 말하며 나를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죽어감을 선택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키우던 강아지가 사라져도 벽보를 붙이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그 어느 누가 제정신일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나의 글에는 담기지 않은 당신과 나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회상하고 상기한 다음 내린 결정이니 아직까지 후회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내 말을 들은 당신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 같다가도 아까와는 정반대의 얼굴인 듯했다. 당신을 만나며 본 표정 중에 감정을 읽기 가장 어려웠다. 읽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우리는 남이 될 사이 아닌가. 당신의 표정이 어떻든, 그 속에 숨은 감정이 무엇이든 이제는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아, 우리도 이렇게 남이 되는구나.
마지막으로 안아 보자느니, 마지막을 내세워 키스를 하고 분위기를 타서 섹스를 하지는 않았다.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입을 맞추고, 커튼을 반쯤 치고, 또 침대에서 뒹굴다 사랑을 주고받으면 분노라던가 원망과 같은 감정이 희석되고, 늘 그랬듯 감정에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웃으며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래 왔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같은 결과를 맞이했기 때문에, 그 악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당신과의 사랑은 아련했던 추억의 한 장면으로 잘 전시하여 남겨 놓고 싶었던 나의 바람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딱 일 년 하고도 삼 일이 되던 날이었다. 원래였다면 우리는 '첫 만남'을 재연하기 위하여 회기로 가서 술을 마시고, 또 여행을 떠나기 위하여 한참 준비하고 있었겠지만. 그날 당신과 나는 밥도 먹지 않았다. 창으로는 가을바람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내가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소리와 똑같은 소리였다. 우리의 정한은 그렇게 갑자기 맺어졌다가 덤덤하게 맺어졌다.
어떤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고, 그런 사랑은 그냥 사랑보다 아팠다. 당신과의 사랑이 그렇게 끝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고즈넉한 가을에 말이다.
상준님, 마지막 원고 보내드립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많은데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며칠 전에 든 생각이 있어요.
둘만의 것으로 남겨야 하는 것도 있나봅니다. 며칠 쉬다가 다음 원고를 준비해 볼게요. 고생하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