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화상> 어느 나의 생일 때, 나는 분명 이런 글을 적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정신적 찌꺼기를 배설하고 싶은 것"이라고. 그 글은 분명 생일 다음 날 새벽에 쓰였다. 생일을 다 보낸 후에. 언젠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가족과 생일 파티를 벌였다. 가족끼리 모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점점 가족 전체가 몸담고 있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 대화는 대략 이랬다. 누가 무슨 일로 '얼마'를 벌었고, 월세는 '얼마'고또 이익은 '얼마'인지. 올해 매출은 '얼마'였고 앞으로 매출은 '얼마'까지 찍어야 한다든지. 이런 얘기들이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 속깊이 뿌리박힌 '일상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 나는 이 '얼마인가'에 대한 대화에 찝찝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분명 내가 돈과 가장 동떨어진 것, 즉 상상을 즐기기 때문인 듯하다. 즉 나는 그런 이야기에 반감과 반작용을 느껴 오히려 완전히 돈거리가 안 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찝찝함의 기원은 무얼까?

그것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돈을 왜 벌려 하는가?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먹고살기 위한 돈 이상의 돈은 대체 왜 벌려고 하는가?

그 이외에 쓰이는 돈은 대개 여러 욕망 때문일 게다. 예를 들면 집, 자동차, 명품 등등. 허나 살고 있는 집을 떠나 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는가?

타고 있는 차를 버리고 왜 새로운 차로 옮겨 타는가?

거기에는 오로지 사회적 이유만 존재한다. 사회적 이유란?

다른 인간의 존재가 고려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긴 하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우주적 존재다.'나'를 스스로 의식할 수 있으며, 동시에 반원으로 허용된 목의 각도를 이용해 땅과 하늘, 그리고 그사이의 연속적으로 펼쳐진 '시방세계의 다채로움'을모두 인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그런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또본능적으로 주어진 태초의 욕망 하나가 있다. 바로 세계와 나를 해명하려는 욕망이다. 그 욕망에 의해, 인간은 전혀 사회적이지 않은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세계, 우주, 신, 그리고 '나'.


전혀 사회적이지 않다는 뜻은 전혀 돈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돈이안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쓸모없음을 의미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 하나 더 물어보자. 쓸모없는 것을 하는 것은 악인가?

점점 질문은 미궁에 빠진다.

왜냐하면... 돈이 되지 않고, 쓸모없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써 당당히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분명 혼란스러워질 게다. '사랑은 쓸모없는가?' 아니라고?

사랑은 분명 필요하다고?

자, '사랑하는 것-사람, 물건 등을 전부 포함하여-에 쓰는 돈은 아까운 것인가?

뭐?

아깝지 않다고?

대체 어디까지 그대 속마음을 부정할 셈인가. 사랑에 쓰는 돈은 분명히 아깝다. 사랑의 양과 그곳에 쓰인 돈의 무게를 실시간으로 비교해보게 되는 것이 사회화된 인간의 습성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해버리면 우리 인간이 아주 초라하고 소박한 존재처럼만 보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쓰이는 돈, 즉,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만 한다.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의 구속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다라는 식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쓸모'는 분명 돈과 관련된 것이어야만 할 테다. 하지만 쓸모없는 것은 그것이 쓸모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돈의 관점에서 벗어난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이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깊게 통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의 구조 밖에 있는 인생의 편린은 이 쓸모없는 것으로만 비출 수 있다. 그곳에 드리운 어둠 속에는 아직도 쓸쓸히 외롭게 울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는 사실은 사실 매우 역설적이다.

왜냐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인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가장 쓸모없다는 것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문에 부치지 않는다는 뜻아닌가. 즉,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다 수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물음 당한다.

"자기소개 해 보세요"라고. 하지만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탐구한다고 할지라도,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완벽히 해명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분명 인문학은 쓸모 있다.


<나는 문학을 왜 하는가?> 글을 왜 쓰는가. 내가 글쓰기를 처음 했던 때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언급하는첫 글쓰기라고 함은 '글이 좋아 자의로 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를 쓰고 독후감을 쓰는 등의 타의에 의한 글쓰기, 아니 문장을 길게 늘어뜨리는 지루한 행위를 해 왔으니까 말이다.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뻔한 레퍼토리의 일기나 숙제라는 명목하에 억지로 쓰곤 했던,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점은'으로 시작하는 독후감 쓰기로는 글쓰기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렵다. 나는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글쓰기에 대한 그 어떤 욕심도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건 정말 짧은 생각이었다. 어느 날 글 하나를 쓰고 싶어서 노트를 펼쳤지만, 첫 문장을 쓰는 것부터 막막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은 가득한데 그것을 수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나의 습작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던 것이었다.


잘 쓴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동경하고 또 질투했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던가.

몇 년을 계속 썼다. 계속 쓰고 또 쓰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제 글쓰기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사유와 회고가 담긴 글쓰기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기계와 프로그램이 제아무리 발달한다고 한들 사유하는 인간의 글솜씨를 이기겠는가. 기껏 문체 정도는 베낄 수 있겠지만, 그 본질적인 울림은 절대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글쓰기가 좋다. '글은 돈이 되지 않잖아요'와 같은 변명을 대며 글쓰기를 멀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글쓰기가 돈이 된다는 것을 내가 보여 주겠다. 그날까지 나는 계속 쓴다. 그날이 오고도 나는 계속 쓸 것 같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듯, 나는 써야 산다. 나는 어제도 썼고,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함> 언어가 가진 힘은 무섭습니다. 어쩌면 강력한 무기보다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을 할 때보다, 청문회에서 더신중했다고 합니다. 십계명은 오래전부터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세계정세를 바꾸고, 스타의 한마디가 어떤 방향으로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어는 물론, 존재 또한 언어를 통해 태어났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며, 사라집니다. 언어는 생명을 불어넣고, 때로는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팝니다.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는요. 언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줄임말, 신조어, 저급한 욕설. 단어들의 MZ, 이단아 같은 존재랄까요. 그것을 언어라 부를 수 있을지 무색한, 좀비 같은 것들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들 또한 병들고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성은 무시되고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저출산은 비단 인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언어를 읽고, 쓰는 사람 또한 점차 사라져갑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인간의 멸종보다 언어의 멸종이 빨리 찾아올 것이 두렵습니다. 언어가 없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그들을 인간이라 부를 수있을까요. 애초에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마당에,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로 불릴 수조차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일어날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언어가 사라질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언어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 남아있을까요. 무섭습니다. 인간은 물론, 저라는 존재가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이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겨야 할 것만 같습니다. 나의 삶을 누군가 읽어주진 않더라도 작게라도, 어디엔가 남아 아득바득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쓴다는 것에 대하여> 글을 쓰는 과정은 대략적으로 이렇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낸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비 피운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한 번 더 읽어본다. 아, 역시나 마구잡이로 끄적인 글은 볼품이 없다. 단어 하나하나 곱씹는다. 내 한 줄 읽었을 때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이해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때까지, 만족스러울 때까지 연마한다. 이 과정을 마쳤을 때 글의 분량은 반 토막이 나기도, 오히려 몇 줄 정도 늘어나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한다. 글에서 제목이 가지는 힘은 글 전체가 주는 울림보다 어쩌면 더 강력하기에 웬만하면 제목은 글을 마무리 지은 후 정한다. 더러는 제목을 비워두기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쓴다는 것에 대해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어 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나에게 유의미한 행위가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필요가 있다. 나는 책을 통해 세상과 등을 지는 선택을 한 동시에, 세상과 마주 볼수 있게 되었다. 글은 나에게 이미 완결되어 버린 텍스트이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준 스승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변화해야만 한다.

어떤 계기였든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의 순간을 지나쳐 보내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한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그 계기가 글이라면 읽고 쓰는 것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 가수는 기독교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하나이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의 마음속 각자의 신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내가 신을 믿지 않음에도 신을 배척하지 않는 이유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세상을 더불어 살아간다고 해도, 그 어떤 누구도 타인과 완전히 같은 삶을 살아내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하물며 너와 내가 같은 글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온 길은 너무도 다르기에, 너만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섞여 또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내가 책을, 글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삶에서, 절벽 끝과도 같던 순간을.

아무도 나를 끌어올려 줄 수가 없던 때에 골랐던 탈출구가 책이다. 그 선택에큰 의미는 없다. 그저 당시에 맨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나에겐 없어서, 닥치는 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아서, 단지 그 정도에 불과한 시작이었다. 점차 글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삶을 채로 베어내어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가며, '쓴다는 행위'의 목적성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 있었다. 글이라는 것은, 책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써내려졌던가. 그저 읽는 이를 위해, 읽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알량한 배려심인가?

책은 말이 없다. 쓰는 것도, 쓴 것을 지우는 것도, 완결된 문장을 가장 먼저 읽는 행위를 하는 것은 나다. 쓴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야 한다. 그저 나라는 한 인간을 위해 읽고 써 왔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나를 위했던 것이 점점 확대되어 너와 나의 관계 속으로까지 들어왔다. 새로운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달된 나의 다짐은 언젠가 나에게로 다시 돌아와 또다시 새로운 의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쓴다는 것에 늘 진심으로 도전해야 한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나의 글도 나의 일부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의 결핍에서 찾아온 순간을 잡아채 또 다른 기회로 만들어 내었던 그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도,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었던 나를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삶의 태도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수많은 글과 책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