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8일 제주도에서 빽빽한 서울의 빌딩 숲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니는 것이 지겨워졌다. 사원증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고.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반복적인 일상에 신물이 났다. 어릴 때는 이 나이쯤 되면 내가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자리 잡아 멋지게 살 줄 알았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일에 미쳐 있는 나, 내 몫의 일을 당당히 해내는 나, 뭐 이런 진부한 로망은 버린 지 오래다. 전부 관두고 싶었다. 일부터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면 뭘 하지. 뭐 해 먹고살지. 직장을 관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했다. 조용한 곳으로 혼자 떠나고 싶었다.

도피성이 짙은 여행일지 몰라도 어딘가 다녀오면 달라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선택한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제주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첫날은 흑돼지구이집에서 꽤나 청승맞은 여자처럼 고기를 구우며 한라산을 마셨다. 그러고 싶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냥 좋았다. 그게 좋았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독립적인 여자' 같아서.


작은 동네를 며칠 동안이나 홀로 거닐었다. 같은 길을 계속 걷기도, 지도를 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어 보기도 했다. 낯선 공간에 떨어진 나. 사실 제발로 찾아온 공간이긴 하지만, 그런 상황 설정 컨셉에서부터 오는 처연함과 서글픔이 좋았다. 그러다 하루는 전부터 가고 싶었던 뮤직바에 들렀다. 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겠지만, 살면서 본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이미지라 눈에 계속 밟혔다. 술집 주인인가?

알바생인가?

술집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고, 많은 의자들이 스피커를 바라보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가운데 자리에는 누군가 머물던 흔적이 보였다.

밖에 있던 남자의 흔적이었다. 아, 손님이었구나.


그 바에서는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틀어 주었다. 내 눈에 밟힌 그 사람은 어떤 노래를 선택할까, 신청곡을 신청해 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그의 신청곡이 나왔다. 그는 노래를 들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썼다.

작곡가인가?

예술... 그런 거 하는 사람인가?

근데 이 노래 뭐지?

좋다. 그의 신청곡을 듣고 나는 시리를 켜서 노래를 찾게 했지만, 평소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오거나 궁금한 노래를 잘만 찾아 주던 시리가 그날은 무슨 노래인지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무슨 노래인지 정말 궁금했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서슴없이 말을 붙일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같은 노래를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신청곡 검정치마 《TEAM BABY》 마지막 10번 트랙 <EVERYTHING>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술과 저급한 웃음- 그때 앨범의 1번 트랙 <난 아니에요>가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저 남자가 신청한 곡일 거야. 맞았다. 역시나 그는 노트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1번 트랙이 끝나고 바로 내가 신청한 10번 트랙이 나왔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나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드라마처럼 누구 한 명이 다가가서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2차 갈까요' 등과 같은 멘트를 건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말이다. 나는 그냥 음악을 들으러 온 것뿐이니까. 생각을 정리하러 제주도에 온 것이 아닌가. 그는 내가 신청한 곡을 가만히 듣다가 먼저 자리를 떴다. 구경할 사람이 사라져 흥미를 잃어버린 나도 뒤이어 술집을 나와 바로 앞바닷가를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스피커로 소란스러운 노랫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였다. 나는 괜한 대화 핑계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눈에 막 들어온, 다시 보니 정말 맛없을 것만 같은 그 맥주를 사서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아까 바에 계셨던 분 맞죠?

검정치마 1번 트랙. 노래 취향이 너무 비슷해서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내밀었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져 있던 맥주. 귀여움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맥주를 보며 나를 쳐다봤다. 흠칫하던 모습.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나의 호의 때문인지 순수한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아, 아까 10번 트랙 맞죠?

저도 두 노래가 연달아 나와서 놀랐어요. 그렇게 우리는 말문을 트게 되고, 어쩌다 제주도에는 오게 되었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등과 같은 잡담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내 상상 속에서 그린 그 사람은 '예술을 하는 독특한 젊은이' 정도였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 보고 알게 된 그는 작곡가도 예술가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또래 남자였다


처음에 신청하셨던 노래 있잖아요. 노래 제목 좀 알 수 있을까요?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고요.

아 그거, 쏜애플의 <서울>이라는 노래예요. 그때 쏜애플을 처음 들었다. 처음 알게 되었다. 밴드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쏜애플은 너무나 생소한 그룹이었으니까 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남자는 흔하디흔한 멘트를 꺼냈다.

같이 맥주나 드실래요?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그에 대한 환상이 깨졌을 때, 그는 다시 진부한 멘트로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멋대로 생각했던 남자의 무거운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 사실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오해한 거잖아.

우연에 우연이 겹쳤을 뿐인데, 너무 내 생각만 하고 그를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뭐라고.


환상은 환상으로 남겨둘걸. 그에 대한 내 상상은 상상으로 둘 것을 그랬다. 후회했다. 그래도 사람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그날은 인스타만 서로 주고받은 뒤, 나는 선약이 있다며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사실 취기가 좀 돌아서 그와 함께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운명적인 인연은 그런 진부한 클리셰를 따라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마무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 덕분에 알게 된 쏜애플의 <서울>을 들으며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를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머리 길고 다정한 이 남자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