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은 나와 안 될 인연이었다고, 더 좋아하는 쪽은 나였다고, 아니, 누가 더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서 얼굴 한 번 실제로 본 적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그 감정은 그저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라며, 내가 유은에게 느낀 감정은 외적인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은 만나면 누구나 느끼는 정욕 정도였을 것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을 부정하고 현실을 회피하려 했던 그해 여름의 내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가지지 못할 바에야 깎아내리자는 희한하고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시기였기에, 유은도 그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러한 어리석고 또, 어리숙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유은을 사랑하게 되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닐뿐더러, 일전에 내가 해 왔던 몇몇 연애 못지않게 힘들어질 것이라고 애써 자위했지만, 나의 실질적인 감정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아무리 잘 속이는 사람이라 한들,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고, 제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노력해 봐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유은을 좋아하는 감정 또한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락을 그만하자는 나의 말에 대한 유은의 답장은 이틀 후에나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은은 내게 학기 중 고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며, 연락을 그만하고 싶거나 귀찮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과 함께, 참 너그럽고 넉살 좋게도 그간 무엇을 하며 지냈냐고,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듯 나도 유은에게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몇 날 며칠 동안이나 마음고생을 했던 것은 전부 잊은 채,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오히려 연락을 관두자고 했던 내 자신이 옹졸해 보일 뿐이었다. 사실 그보다도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가장 큰 한마디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은이 내뱉은 말이었다.

저는 성북구글싸개 님이랑 연락하는 것이 재밌어요.

질리거나 따분해서 요 며칠 답장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혹시 유은 또한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하는 생각에 괜히 들떴고, 그럴 때면 나와 유은 사이의 현실적인 장애물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채로, 나는 유은과 사랑에 빠져 행복한 미래를 함께하는 상상에 젖어 들곤 했다. 연락 한 통에 울고 웃었던 지난날의 내가 그려지며, 그때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갈대같이 굴었나 싶기도 하지만, 그 또한 스물하나라는 어린 나이였기에, 그따위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들었던 감정의 편린이 아니었을는지 생각해 본다.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일전과 달리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유은의 연락 빈도 또한 내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잦아졌고, 나 또한 유은에 대한 과한 기대라든가 호감과 같은 감정들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워나갔던 것 같다. 유은과의 관계가 원만하던 여남은 일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듯했다. 사람의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마는, 그것이 행복이라든가 친절로 표출된다고 하면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은 덕에 기분이 고조되어 있던 나는 잘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불필요한 배려나 친절 따위를 제공하면서 귀찮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한동안은 나의 마음에 근심이나 걱정 자체가 없었다.


모든 소설에 갈등이 있고,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 온다. 어쩌면 나는 유은과 별말 없이 연락을 주고받던 와중에도 언젠가 찾아올 우리 사이 갈등의 순간을 두려워하며 걱정했다. 불길함에 대한 우리의 걱정과 예상은 대개 꼭 들어맞는 경우가 많아서, 다가오지도 않은 유은과의 갈등은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혼자 불안해했다.

장마가 한창이던 그해 여름 초입에서 내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좀 잘 되려나 싶다가도 학기말 고사 준비라든가 과제 따위로 인하여 유은의 연락 빈도는 다시 예전만 못하게 줄어들었고, 유은이 삶의 원동력이나 다름이 없었던 나는 유은의 주된 관심사나 우선순위에 내가 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나는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유은과 달리 하루하루를 죽여가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저녁,또 무언가에 씌인 사람마냥 '이 관계를 끊어내야 내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유은에게 일방적인 연락을 보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몇 번이고 연락을 관두고, 누군가 붙잡아 다시 연락하는 행위를 반복했는데, 연인도 아닌 남녀 둘이서 무엇을 했는가 싶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묘사하고 싶다가도 워낙 세월이 흐른 탓에 당시의 생생한 감정을 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뿐더러, 결과 뻔한 남녀 사이의 치정 싸움 내용을 일일이 적어 봐야 지루해지기만 할 듯하여 이쯤에서 각설하려 한다.


희한하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더 이상 연락을 나누지 않게 되었다. 그전까지 그렇게나 의견을 번복해 가며 유은과의 연락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나나 유은이나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임을 잘 알고 있어서, 아니,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는지 싶다. 그렇기에 우리는 얼굴 마주하고 대화 나누는 다른 연인들에 비해 가끔은 무심하기도, 가끔은 더 솔직해지기도, 어떤 날에는 '진심'이라는 단어를 방패로 삼아 위선과 가식을 떨기도,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연락을 그만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서로 지치는 와중에 상대방에 대한 흥미 또한 자연스레 떨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유은에 대한 나의 관심의 정도가 소홀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궁금했던 것을 다 알아버려서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유은은 더 이상 내게 궁금한 것도,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몰려드는 무력감과 공허함은 표현할 수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유은과는 관계를 이어 나가더라도 결국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았고, 어쩌다 인연이 닿아 실제로 마주하는 날이 온다고 한들, 그때가 되면 유은에 대한 나의 감정은 미력 혹은 회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 그날, 나는 유은과의 관계를 끊어냈다. 연락처를 삭제하고 블로그를 탈퇴했다.


유은과 다시 만난 것은 그해 여름으로부터 해가 두 번이나 바뀌고 세 번을 향해 달려갈 무렵이 되어서였다. 유은과 연락을 관두고 난 후에 나의 세월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국방의 숙제를 해결하느라 몇 번의 사랑에 도전하고 또, 실패하였는가.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실패의 고배를 마셨고, 또, 나름대로 적성 맞는 일을 찾아 살아갔던 지난날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훗날 기회가 된다면 술회해 보기로 하고, 좌우지간 유은과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내가, 늘 꿈에 그리던 유은과, 그것도 우연히. 유은을 만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연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면이 있었으니, 그 재회의 과정 또한 여느 연인들보다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 공연이라든가 뮤지컬에 관심도 없는 내가, 휴가 나온 친구 비위를 좀 맞춰주기 위해 광화문에 갔을 때였다. 이런 문화생활에 조예가 깊었던 유은이 떠오르며,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쪽으로 가면 되나아?

그래. 유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