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시작되고 나는 학교로, 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개강을 하고서 일주일 정도는 무슨 개강총회니, 파티니 하며 술이나 진탕 퍼마시는 자리에 막 끌려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최를 만날 여유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와중에도 연락은 꾸준히 하며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미리 알아 놓으면 좋을, 서로에 대한 시답잖은 것들을 묻고 답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그 당시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참여했던 술자리를 회고해 보자면 이렇다. 학과에 가깝도록 친한 사람이 몇 있으면 그런 술자리가 재밌었겠지만, 친하다고 내세울 만한 사람도 몇 없을뿐더러 그나마 안면 있는 사람들마저도 단둘이 있게 되면 뻘쭘해서 할 말이 사라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직전 학기에 정과 연애를 하며 소홀했던 학과 생활을 인제부터라도 조금 부지런히 해 두어야 남들이 선배로부터 받는 '대학 시험 족보'라던가 지나고 보면 쓸데도 없지만 대학에 다닐 때만큼은 값지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얻어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늦게나마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악했었다. 마음과 정신을 잡지 않으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시간 낭비와 마음에도 없는 친목에 불과한 술자리였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불안했던 당시의 감정은 아직 생생하다.


손꼽아 기다리던 주말이 되고 최를 만났다. 사석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은 그때로 두 번째였으니 마냥 설레는 본심과는 달리, 앞에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그간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일종의 '탐색'도 끝냈고, 간간이 전화도 하며 심리적인 경계까지 풀린 터라 처음 만날 때보다는 긴장감이 덜했다. 그래도 최와 눈을 마주칠 때면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아우라 따위를 직접적으로 느껴 본 적이 없지만, 최는 확실히 달랐다.

아무튼 우리는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는 고깃집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지만 두 달 안에 그 일을 관두고 새로운 일을 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래라면 학교에 갈 생각이 죽어도 없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나를 보니 본인도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사실 그보다 무언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데 그토록 가치관을 바꾸면서까지 배우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비밀에 부쳤다. 따지고 보면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인데, 할 말이 어찌 그렇게나 많던지 강의 서너 개는 연달아 들어야 겨우 지나 있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서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사귀지도 않던 사이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주말마다 만나서는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즐겼다. 아, 나는 비록 몇 주가 되도록 최의 손도 잡지 못하였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좋았던가. 한동안은 그렇고 그런 만남이 계속되었고, 최와의 사랑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날씨가 쌀쌀해지고 나서였으니, 아마 시월이 열리고도 끝자락에 다다라서였을 것이다. 최가 일전에 꺼낸 '사귀지 않고 그냥 몇 번 만나 보자'는 그 말 때문에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때였다. 사귀지 않을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는 것인지, 그냥 몇 번 만나는 것이라면 그횟수는 몇이나 될는지, 사귀지 않는 사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로 가까워지고 또,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고 두려웠다. 우리의 관계는 '연애'라는 약속으로 묶어둔 관계도 아니기에 내가 자칫 실수하기라도 하면 없던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다 동창들과의 술자리에서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남자들 술자리 이야기가 그렇듯,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냐, 요즘 잘 되어 가는 여자가 있냐, 여자가 있으면 소개 좀 해 달라, 너 요즘 하는 일이 뭐냐, 등과 같은 이야기가 평소처럼 오갔다. 원래 나는 내 사랑에 대한 조언 따위를 남에게 구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나도 답답한 마음에 최와의 이야기를 동창들에게 꺼내게 되었다.


최와 알게 된 계기부터 시작하여, 주말마다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행위를 함께한 횟수 또한 열 번 가까이 된다는 점까지 하나도 빠지는것 없이 말했다. 당사자인 것을 감안하고도 내가 바라보는 나와 최 사이의 관계는 애매하고 당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제삼자들이 보기에는 오죽했겠는가.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이들 중 하나는 그저 호구 잡힌 것이 아니냐는 말을 꺼냈고, 하나는 나 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편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전자의 의견에 힘이 더 쏠리는 듯했지만, 사실 나는 최에게 그렇다고 할 만큼 조공을 바치거나, 만났을 때 먹고 노는 데에 쓰는 비용을 무조건적으로 내가 부담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까지 말하고 나서야 다수가 후자의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다가오는 주말에도 어김없이 최와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나는 아마 술자리에서 얻은 용기 때문인지 그 주말에는 어정쩡한 우리 관계에 대해 제대로 정립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거창하게 말하지만 그래 봤자 내가 최에게 고백을 하고 최가 나의 고백을 받든가, 거절하든가, 결과가 둘 중 하나로 정해진 뻔한 게임이었지만 말이다. 최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히고 괜히 식은땀이 나던 나였지만, 그래도 연애를 아예 안 해 본 것은 아닌 데다가 어찌 보면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로는 삶에서 사랑의 공백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일전에 했던 몇 번의 크고 작은 사랑과 그사랑의 흥망성쇠를 회고하고 복기하며 마음 고백할 준비를 했다.


화곡이었나 까치산이었나, 아니 오목교였나. 처음 가 보는 동네라 지명이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다. 그 주말에는 생소한 동네에서 약속이 잡혔다. 생각보다 일찍이 새 직장을 구했다던 최의 일자리가 그곳이었기에 나는 마중을 하러 갔던 것이었다. 고깃집 일 같은 경우에는 평일 동안 일을 하고, 사장님께서 급히 손을 빌리는 일이 없다면 주말에는 휴식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바뀐 직장의 경우 돈을 훨씬 더 받는 대신 주말을 전부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뭐,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최를 좋아하는 감정이 최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보다 조금 크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최에게 맞춰 주는 부분이 더욱 많았고, 최가 내게 맞출 일은 거의 없을 정도로 최가 불편할 만한 일은 아예 벌이지조차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고백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했다. 사실 그날의 고백도 돌이켜보면 찝찝한 구석이 없지만은 않지만, 최가 나의 고백을 받아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희열감 때문에 좀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찝찝한 구석'에대해 언급해 보자면 이렇다. 상대방이 고백이라는 것을 하고 받는 입장이 되면 '거절'을 하든가 '승낙'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거절'하게 되는 경우에는 미안하거나 부담스러운 감정 때문에 표정이 굳어질 수 있지만, 고백을 받아 주는 '승낙'의 경우에는 좀처럼 표정이 굳어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의 경우에는 나의 고백을 받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뭐··· 사귀자 우리'라고 말했으니. 어찌 보면 그 사랑의 시작부터 안 될 인연이었음을 암시했던 것이 아닐까.


그 연애가 시작되고 나흘 정도는 여느 연애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으니 어린 나이에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다들 어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사랑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에 의문이 들었다는 말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하자면, 최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였다는 말이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상대방의 생활 패턴을 이해 못 해 줄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았다. 나 또한 사회생활을 아예 안 해 본 것이 아닌 데다가 최의 성격을 잘 아는 탓에 최가 연락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은 진작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제 이해가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사랑에 의구심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일 때문에 연락이 안 되는 것은 백번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어떤 날은 일이 끝나고 그다음 날이 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날이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지만, 일이 계속될수록 잦아졌다. 게다가 최는 새로운 직장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거기서 최가 담당하는 업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일절 언급해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잦아지다 보니 나는 연애를 하면서도 오히려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언급한 '외로움'이란 육체적인 외로움이 아니었다. 사랑이라고 하면 정서적인 부분이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실된 감정도 서슴없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최는 지나치게 스스로를 숨기는 면이 있었고, 나와의 정서적인 교류에는 담을 쌓는 듯해 보였으니 내가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나의 고민을 꺼내거나 조언을 받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술자리-최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구했던 조언-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나와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하루는 잘 모르는 사람이 내게 '연애는 잘하고 계세요?'라는 질문을 건넸다. 그날 이후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비밀은 없고, 그 소문이 수만 리 밖까지 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사랑 이야기에 타인의 자문을 구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불안했다. 끊임없이 불안했다. 나는 최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장면을 망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내게 남아 있는 습관, 그러니까 별다른 연락 없이 애인이 잠적하였을 때 불안해지고 머리 전체가 새하얘지는 좋지 못한 습관은 이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골방에서 한참 혼자 힘들어하고 고민하다 연락을 한 통 보냈다.

생각을 오래 해 봤는데 내 사랑이 네 사랑보다 큰 것 같아.

어쩌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