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마주한 유은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유은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아주 반기는 듯한 얼굴은 아니었으니, 짐작해 보건대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연락이 끊긴 뒤로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유은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앳돼 보임이 남아 있던 얼굴에서는 이제 성숙함만이 느껴졌고, 입는 옷이라든가 화장법 같은 것이 이제는 제 색깔을 찾은 듯, 유은은 더 유은다워져 있었다. 이제 막 군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로 나와 가진 것 없고 자리잡혀 있는 것이 하나 없던 나와 달리, 유은의 지난 이태 동안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살았는지 제법 성인으로서의 태가 났다. 그날 뮤지컬을 보기로 했던 나의 친구와, 유은을 따라 나온 유은의 지인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한참 전에 연락이 끊겨 버려 어찌 살고 있는지도 몰랐던 인연'과 다시 만나는 그런 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었으니, 그들 또한 원래 잡아 놓았던 약속은 안중에도 없는 듯,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고맙게도 자리를 비켜 주었다.


눈치 빠른 지인들의 배려 덕에 나는 유은과 비로소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실제로 만나 보면 어떨까, 유은의 비언어적 행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우리 대화 사이에 정적이 흐르면 그것을 누가 먼저 깨뜨릴까, 아니, 그보다 나는 당신을 잊었으니 잊은 적이 없었다. 당신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떠올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새로운 기억이 낡은 기억을 빠르게 덮어씌우는 바람에 나는 유은을 거의 잊은 채, 그러면서도 지우지는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던 유은과 실제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한때는 나의 최대 관심사이자 세상 그 어느 유명인보다 만나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나의 전부와도 같았던 그 사람을, 그해 여름 불같은 욕망과 열기가 한소끔 끓어오르고 나서야 해가 세 번 가까이 바뀌고서야, 그제야 우연치 않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참, 사람 산다는 게 잡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워지는 장난과도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유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있잖아.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건데 마치 몇 번이고 만난 사이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아까 눈을 마주쳤을 때 말이야. 잊고 있던 기억이 연결되며 뭔가 짜릿한 기분이 들었거든. 얼마 만인 거지, 3년 만인가?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너와의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


나에게는 선명히 남아 있던 우리의 마지막 연락을 유은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락을 하고 관두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마지못해 연락을 그만하자고 말한 쪽이 나였기 때문에 내 기억이 유은의 것보다 더 선명하지 않았나 싶다. 따질 것 없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우연이라는 기회가 우리 둘사이에 찾아오는 날은 그날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머지 나는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제안을 유은에게 꺼냈다.

"기억이 안 나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늘상 문자할 때는 존댓말만 쓰더니 만나니까 반말이 잘만 써지는구나.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더는 없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녁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술이나 한잔하는 것이 어때? "대답 대신 활짝 웃음으로 긍정을 표하던 유은의 미소는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유은에게 빠졌던 것은 한때의 충동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는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그날 우리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그렇게나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회억하기보다 그해 여름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너는 그러게 나한테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냐. ""모질게 군 게 아니라 거기서 그럼 뭘 어떻게 더 잘해 주냐. 너 그때 내가 올렸던글 기억하니? ""아 그 초성 글? ""응, 그거.

어떻게 맞춘 거야?

"그건 비밀.

무슨 문장이었더라...

'나는 왜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였나. ""별걸 다 기억하네. ""별거라니. 그날 내 하루의 전부였는데. 서울에는 웬일이야?

"당분간은 서울에 있어. 공부 때문에. 아무튼 정말 신기하다. "


취기가 올라오고 유은과의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과거 내가 단순한 정욕 따위로 치부하며 부정했던 유은에 대한 호감이 되살아나며, 어쩌면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 또한 그따위 육에 불과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나는 유은을 실제로 마주한 상태였고, 남녀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욕이든 육욕이든 필요한 법이니,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여태 궁금했던 것을 묻고 답하기 시작했고, 그 대화가 어찌나 길어졌던지 양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이 서너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아, 그날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러니까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조급함은 지금 서술하는 것의 몇 배나 되었고, 그 탓에 나는 조금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제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는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너도 당분간은 서울에 머문다고 하니 우리 만나 보자. 미성숙하고 어리숙한 지난날의 나와는 스스로 작별한 지 오래거든. "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마음을 고백했고, 무언가에 씌인 듯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었다. 고맙고 놀랍게도 유은은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고,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을 때의 쾌감이라든가 일이 내 뜻대로 풀렸을 때 드는 만족감에 대해서는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으니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유은과의 연애 또한 그러한 감정을 뛰어넘을 정도로 나를 흥분시켰고, 마치 우리는 극적인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여태껏 많은 고난을 겪어온 것처럼, 마침내 '유은과의 연애'라는 결실로 나의 지난 몇 해를 보상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은 정말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은의 얼굴 한 번본 적 없던 때에도 유은과 연락이 잘 되기라도 한다면 온종일 기분이 좋아져 괜한 친절이나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 유은을 실제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리니 나의 감정은 당시의 몇 배가 될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유은은 그때까지 만나 왔던 여느 여자와는 달랐고, 또, 내가 주변에서 봐 왔던 수많은 여자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유은은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과거와 별다를 것 없이 그녀는 삶에 있어서 여전히 본인이 최우선이었고, 사랑이나 부차적인 것들은 늘 차선이었다. 어쩌면 유은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이 차선이 아닌 그보다도 못한 차차선 정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다시 회의감에 빠졌다. 이 사람이 나랑 연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차 얼굴 맞댄 사이가 아니었으니 내가 괜한 추억에 잠겨 알은체를 한 것이 아닐까, 유은은 지난 공백 동안 전공하는 불란서어를 보다 심화적으로 공부하고 외국 대학 교환학생 신청과 세계 일주라는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 공부와 일에 집중하며 살고 있었는데,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이 사랑을 사랑만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에 잠겨 살았다. 인제 와 생각해 보면 조건과 배경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20대 연애의 아름다움인데, 무엇을 그리도 걱정했나 우습기까지 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어느 날 유은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