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연락을 보내고서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나. 유은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사실 답장이 오기까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애꿎은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며 확인했는지 너는 모른다. 나는 습관이라고 본다면 습관일 수도, 버릇이라고 본다면 버릇처럼 보일지도, 규칙이라고 본다면 규칙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글로 소개하는 건 처음이라 어떤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나만의 '규칙'이라고 보는 게 가장 알맞지 않을까 싶다. 그래, 내가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는 규칙이 있다. 만났던 애인들을 전부 포함하여 친구들에게까지 이 '규칙'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으니, 아마이 글을 통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연락'이라고 부르는 이 규칙은 상대방으로부터 연락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면,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연락이 오지 않고, 무심한 척하며 휴대전화를 치우고 다른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연락이 왔나 확인해 보면 희한하게도 연락이 와 있는, 뭐,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기다리는 연락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신경을 써서라도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으려 하곤 했다. 슬프지만 이런 이상한 규칙은 최*를 만나며 생긴 것이다. * 「지고 들어가는 사랑 이야기」~「어떤 연애는 끝나면 후련하다」 참고


어떤 답장이 올까. 걱정하고 상상하고 또 고민했다. 애써 태연한 척, 덤덤한 척하며 휴대전화를 덮어 두었고, 머리에 무엇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하고, 내 할 일 열심히 하고 있는 '척'을 하고, 유은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자위하며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했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확인해 보니 연락이 와 있었다. 유은이었다. 그런 몇 시간 동안의 마음고생이 뻘쭘해질 정도로 유은의 답장은 상당히 짧고 담백했다. 유은이 보낸 답장 뒤에는 우리 세대들이 당시에 잘 쓰지 않던 '~(물결)'과 같은 문장 부호도 있었는데, 일전에 언급했듯 유은이 평소 그런 문장 부호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호가 유은에게 있어 '언짢음'이라든가 '귀찮음' 따위로 사용되었다는 오해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답장은 너무나 짧고 딱딱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답장이었다.

좋아요~ 연락하고 지내요.


반나절이 다 되도록 기다린 나의 일방적인 정성과 진심 어린 마음 고백에 비하여 상당히 무심한 답장이었기에 혹시나 추가적인 답장이 올까 봐 하염없이 기다려 보았지만, 답장은 정말로 그것이 전부였다. '좋아요~ 연락하고 지내요'라는 그 답장을 처음 받았을 때의 기분은 이렇다. 유은이 정녕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 맞는지, 혹, 그것이 아니라면 거절하기에는 뭐해서 마지못해 수락한 것은 아닌지, 연락하고 지내자는 그 말 뒤에 어떠한 문장도 붙지 않았으니 이야기를 오롯이 내가 주도하여 이끌어가야 할 텐데, 아, 혹시 이것은 유은이 나의 재치나 말재주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닐는지. 만일 내가 유은의 연락에 답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누기로 했던 '연락'이라는 것은 없던 일이 된다는 말인가. 유은은 인사불성으로 마구 민폐를 끼쳤던 그날의 내 모습을 보고 벌써 있는 정 없는 정을 다 떼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상념과 후회에 빠졌던 것이었다. 훗날 유은에게 직접 들은 그 답장의 의도는 나를 참으로 허무하게 만들다 못해, 내가 가졌던 잡념들이 헛된 감정 소모였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상실감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사실 유은은 나의 연락이 진심으로 반가웠고, 그런 마음에 나름 정성스레 보낸 답장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느꼈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말투가 그런 것을 어쩌냐며,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애교 섞인 말투로 살갑게 대할 수도 없는 법 아니냐며 장난을 치던 유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AA(유은의 닉네임) 님은 진짜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한참을 고민하다 내가 남긴 답장이었다. 만일 유은이 나의 답장에 기대를 걸었더라면 적잖이 실망했으리라. 유은이 먼저 무미건조한 답장을 남겼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마음에 남긴 답장은 아니었으며, 할 말이 없어서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정말 유은의 취미가 궁금했다. 정확히는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은의 단편적인 모습만 알고 있었고, 그 모습만을 보고 빠져든 것이었다. 취미가 무엇이냐 물은 뒤에 '처음부터 너무 진부한 질문이었나요?'라는 말까지 남겨서일까. 우리는 한참이나 휴대전화 액정 너머 있는 서로의 모습을 상상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키우던 강아지의 이름은 물론이며, 옆집 고양이의 종까지 알게 되었을 때, 시계는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의 시간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유는 다음 날이 무슨 무슨 공모전의 기획서를 받는 제출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지나서 내가 무엇을 그토록 준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떠오르지 않지만, 유은의 입에서 '자러 가 보겠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허둥지둥 컴퓨터 앞으로 가서 기획서를 마감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 공모전은 내게 꼭 필요하고 중요했던 무언가가 아니었을 성싶다.


유은과의 연락은 참 재미있었다. 진작 용기를 내어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나와 닮은 구석이 참 많은 한편, 나보다 훨씬 내실이 단단하며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 하나도 없는 상태로 '살아감의 이유란 무엇인가' 따위의 철학적 고민에 빠져 스물하나를 허비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유은에게는 꿈이 분명했다. 그 꿈이라는 것이 먹고살기 위한 방도인지, 진정으로 좇는 꿈인지에 대해서는 오직 유은만이 알고 있겠지만, 내가 보고 들은 유은의 꿈은 후자에 가까웠다. 멋있었다. 처음에는 유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만, 날이 갈수록 유은의 독기와 철저함에 존경심과 경외심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꿈 없이 방황만 해대는 사람인 반면, 유은은 성실한 대학생 그 이상에 해당될 정도로 알찬 사람이었기에, 비교를 하면 할수록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또, 알 수 없는 자격지심 따위의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인제 와 생각해 보면 스물하나 짜리가 허황되고 원대한 꿈을 꾸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그런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에 빠져 살았었나 싶기도 하지만, 또,그러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유은은 정말 바빴다. 여유라든가 유흥보다는 미래와 목표가 우선인 듯해 보였다. 원래 새로운 물건이나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호기심이 들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기심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유은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일종의 그러한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합리적인 오해였던 것이 어느 때에는 내게 답장조차 하지 않은 채 유은은 제 할 일을 하러 갔고, 어느 날에는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긴 채 이틀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호감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작용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일전에 이야기했던 최와의 연애 끝에 '상대방과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해 죽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유은의 연락 부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혼자 실망했다. 유은은 하지도 않았을 고민을 하고는 내 멋대로 '유은은 내게 관심이 없을 것'이라며 단정 짓고 연락을 보냈다.

우리 그만 연락해요. 잘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