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에게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정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야기하면서도 정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거나 지나치게 침울해진다 싶으면 '방금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비유를 든 것'이라며 정을 달래곤 했다. 끝날 사이에 나는 대체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까지 이별을 포장했었나.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 너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부담감을 느낀다, 우리가 계속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린 이러한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됐을 텐데. 나는 정이 큰 충격에 빠지거나 실망하여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진심을 완곡히 돌려 말했다. 와중에도 위선과 가식을 떠는 내가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래. 처음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정은 모종의 '사건' 때문에 휴학을 좀 길게 하였고, 그 탓에 스물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삼 학년 일 학기를 수강한다고 언급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정과 단둘이 어울리는 것을 알게 된 나의 친구-정을 처음 본 자리에 있었던 정과 같은 학과 친구-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몇 번의 고민 끝에 해 준 이야기를 꺼내 볼까. 정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들은 것이 있냐고, 그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냐며 내게 묻는 친구의 말을 처음에는 단칼에 거절하고 말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지만,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것이 참 문제다.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없던 시련도 생기곤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신화 속 판도라도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제우스가 준 그 상자를 열었던 것이고, 온갖 재액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시시콜콜한 고전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두자.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날 친구로부터 정이 휴학을 하고 잠적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건'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기어코 내 손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이다. 심장이 너무나 뛰어서 호흡이 가빠지고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한 며칠 동안은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와서 차분히 그 '사건'의 핵심만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정이 스무 살, 그러니까 신입생일 때의 일이다. 대부분 스무 살이라면 다들 풋내 나고 어설프기 마련인데, 정은 또래에 비해 성숙한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 탓에 정은 동갑내기 동기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두 학년 정도 위 선배들과 어울리곤 했단다. 동기들과 어울릴 때면 겉도는 느낌이 들었던 나머지, 정도 선배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 같다. 기존 무리에 새 인물이 등장하면, 그 무리에 원래 있던 사람 몇 명이 텃세를 부리기 마련이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 무리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을 앗아간 정을 아니꼽게 생각한 몇몇의 사람들이 정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을 냈단다. 뻔하고 뻔한, 그렇고 그런 소문들 말이다. 술자리에서는 소문이 빠르다. 그 소문은 포장되고 부풀려져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정도 그렇게 당한 것이다. 피해자였던 것이다.
정에 대한 그 소문은 정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전해 듣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성숙한 판단을 할 만큼 스물이라는 나이는 크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도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는 소문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다.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어 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는 분노했다. 정에 대해 분노하고, 그 이상한 소문을 낸 사람들을 죽일까,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까지 죽이면 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랬으면 안 되지만 '정이 혼자 다녔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며칠간 숨만 쉬다 하루를 보내고, 자고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머리가 개운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쩌면 그 기간 동안에 내 마음은 일종의 '합리화 과정'을 끝냈던 것일지 모른다. 그때는 정에 대한 안쓰러움과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길래. 내가 들은 그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을 정에게는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소문은 그저 사람 하나를 망가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위했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정에게 이별을 고했던 때로. 그날 내가 정에게 하고 싶다던 '이야기'는 어쩌면 자기변호를 위한 변명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나는 '연민'에서부터 비롯된 정에 대한 감정이 점점 커졌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랑의 기저에 연민이 깔리게 되면 그 사랑은 큰 사랑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정을 깊이 사랑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 이를테면 금전적인 문제나 입대 문제- 따위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여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정이 불편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 와서 상황을 복기해 본다면, 내가 정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 그날 들은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정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누구보다 나를 원망했다. 정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나눈 말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나의 횡설수설과 과한 자기변호 탓에 핵심은 단 몇 줄에 불과했다.
솔직히 네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만큼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커지지 않아. 커질 생각도 없는 것 같아. 미안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누나'라는 호칭이 아닌 '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도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내뱉던 내게 그 호칭은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일부러 조금의 거리를 두며 선을 그은 것이었다. 좋아함과 사랑함은 다르니까. 사랑 안에는 호감이 있지만, 어떤 호감은 노력으로도 사랑까지 못 가는 경우가 있다
진짜 나쁘다. 개새끼.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은 이야기가 '결론' 부분에 이르렀을 때 입을 뗐다. 정이 이렇게 답하리라 예상하던 여러 문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내가 짐작하던 문장은 다행스럽게도 나오지 않았다. '너도 똑같은 쓰레기였구나', '너도 나를 가지고 논 거야?' 정도의 말까지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만약 그러한 말을 들었더라면 내가 고한 이별에 더욱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결정을 미루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해 나는 이별한 직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세워져 있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정에게 이별을 고하고 간만에 사람을 좀 만나 술을 마셨다. 개중에는 정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정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내가 이별했다는 말을 듣더니 '졸라 나쁘네 씹새끼'라고 말했고, 누구는 '원래 있을 때는 소중한 걸 몰라'라고 말하며 비아냥댔다. 나는 정과 있었던 그 어떠한 일도 술자리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별을 결심했는지, 정이 연루되었던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헤어졌다는 소식만 전했을 뿐이었다. 정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정을 사랑하지 못한 것일 뿐.
아, 이렇게 정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접어 본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다는 말이겠지. 이제 최에 대한 이야기를 열어 볼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