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 열기 전, 지난 사랑 이야기에 나왔던 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볼까. 아마 다들 '최'에 대해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최와의 사랑이 끝물일 무렵, 나는 '내 사랑이 네 사랑보다 커'라는 말을 유행가 가사 흥얼거리듯 중얼거렸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데, 유은과의 연애에서는 그 말 대신 '사랑만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이라는 문장을 계속 혼자 중얼거리는 순간이 날이 갈수록 잦아지곤 했다. '내가 왜 좋냐'는 질문에 대한 유은의 답변은 간단했다. '사랑하니까'. 가식이나 고민 없이 솔직한 눈치였다.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더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가 좋다는 사람에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너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좋아하냐'라고 물어본다거나,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광화문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져서 그랬던 것 아니냐'고 물어볼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내가 그러한 말을 꺼냈다면, 내 말에 대한 유은의 대답이 어떻든 간에, 유은은 속으로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으니까. 사랑한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왜 사랑하냐, 너는 나보다 일이 우선인 것 같다'는 소리를 한다면, 유은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사랑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랑이란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고 추측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생각이 너무나 짧아서 사랑이 눈으로 보여야 직성에 풀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너무 나만 생각했고, 나의 세상의 전부는 유은이라 생각했다. 현실 감각 없이 사랑과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만 갈구했으며, 내 사랑의 크기와 유은이 내게 주는 사랑의 크기가 반드시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사회를 떠나 군이라는 집단 안에서 생활하고, 제대를 하여 사회에 나온 것이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많았지만 그저 막연했고, 그런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부담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사랑을 택했던 것이 아닐 성싶다. 심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아주 불안했던 시기에 시작한 사랑이다 보니 자연스레 내게는 유은과의 사랑이 최우선 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고, 유은이 내게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처럼 느껴질 때면 큰 실망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더 여유롭고 멋있는 놈이었다면 우리 사랑이 달라졌을 텐데. 후회는 언제 해도 늦지만, 애꿎은 지난날을 들쑤셔 본다.
당시 유은은 지금 당장 내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여도 뒤처지는 부분 하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들이야 국방의 의무라는 책임을 지느라 2년이라는 시간을 강제로 날린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2년 동안 군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 시간을 값지게 쓰는 여자를 보진 못했다. 반면 유은은 내가 군에 있는 동안 남들보다 훨씬 값진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가치를 높였다.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 나와의 사랑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유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당시 내게 소홀했던 유은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아니, 유은은 내게 소홀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하루와 유은의 하루를 비교하였을 때,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우리 각자에게 하루의 가치는 너무나도 달라서 내게는 24시간이 너무나 길었고, 유은에게는 그 24시간이 너무나 짧았던 것이었다. 유은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던 나는, 아아,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만이 사랑인 줄로만 알았던 어린 날의 나는 참 어리석었다.
시간이 흘러 뒤늦게 후회하는 것은 뒷북에 불과한 일이다. 유은과 광화문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을 당시에도 나는 '과거의 나를 아예 청산하고 새로 태어났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하며 몇 년 전에 비하여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대단한 사실인 양 내세웠지만, 정작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고 나니 나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 옛날 일을 추억하며 '그때 좀 더 성숙했더라면...' 후회한다고 한들, 유은과 다시 연애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비슷한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물론, 이제는 나도 몇 번의 사랑을 더 겪으며, 깨지고, 또, 울고 웃으며 성숙해졌고, 이제는 유은처럼 내게도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목표가 생겼기에 지금 이 글 하나 쓰는 것마저 여유가 필요하지만, 그래서 유은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일이 덜하겠지만, 확언할 수는 없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런 존재니까. 다시 겪어 보기 전까지 알 수 있는 건 없다.
"너는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니? "유은이 처음으로 내게 던진 미래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난 뒤에 연애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옛 감정에 취하여 몇 해 전에 얻은 서로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연애를 시작했으니, 지나온 세월에 따른 서로의 변화를 잘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평소에 내가 먼저 이러한 진취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나는 밑천이 분명했고, 유은 앞에서 뭐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나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애써 숨기며 피하던 주제가 유은의 입에서 먼저 나오고야 말았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러게.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어. 우선은 복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지만 말하기 부끄러워서 둘러댄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방황 중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나의 미래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꽉 막히고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미래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을 꺼낸 이유가 있었을 터. 유은이라면 무언가 대단한 계획이 있을 듯하여 나도 물어보았다.
"너는 뭘 할 거야 이제? ""사실 내가 준비하고 있다던 교환학생 말야... 계획 중이라고만 말하긴 했는데 사실 진작 준비 중이었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마지막 단계라... 아마 합격한다면 유학을 가지 않을까 싶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유학에 대한 꿈이 확고했던 유은이었기에 언젠가는 한국을 떠나 불란서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만, 그 순간이 생각보다 더 이르게 찾아온 것이었다.
"떠나면 언제 돌아오는데? ""떠난다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잖아. 하하. 아예 그곳에 눌러앉겠다는 것도 아닌데 말야. 아마 이번에 가면 내후년에 돌아올 것 같아"
2년이라는 기한을 들었을 때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였다. 당시 나는 어떤 기분이었느냐면 마치 결혼 당일이 되어서야 배우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절, 처음 본 배우자의 얼굴이 예상과는 너무 달라서 드는 절망감,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불쌍한 조상의 심정과 내 처지가 감히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유은에게는 한국을 떠나 외국에 가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유은이 어찌나 그 순간을 고대해 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유은이 가지 않았으면 했다. 2년이라는 기간이 기약되어 있지만, 그 2년은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기간이고, 내가 군에서 보냈던 2년이란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까마득했기에 절망스러웠다.
"2년 동안 나는 뭘 해야 하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속으로만 떠올리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순간에 유은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유은은 과거에 비해 더 멋진 사람으로 자라 있었다. 그런 유은이 나에게는 정말 전부였다. 삶의 원동력이자 이유가 곧 유은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유은이 유학을 간다. 나는 가 본 적도 없는 불란서로 유학을 떠난다. 아, 정말 끔찍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응원해 주어도 모자랄망정 끔찍하다고 표현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못나 보이지만, 하지만, 한국과의 시차가 여덟 시간이나 나고, 유은은 그곳에서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연락은 평소보다 더 어려울 것이고, 전화는커녕 문자도 하루에 몇 통 나누지 못할 것이 뻔했다. 최와 연락할 적에 연락이 안 되면 불안했지만 유은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연락 안 된다고 해서 불안한 감정이 심하게 들지는 않았다. 유은은 다른 이성이나 잡다한 유혹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니라 미래와 공부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아, 그렇지만 불란서는 이곳과 너무 먼 곳이다. 유은이 더 발전하기 위해 떠난 사이 나는 한국에서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아, 내가 바뀌어야 했다. 나도 무언가 하나에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자는 군대 다녀오면 철이 든다고들 하는데 나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유은이 말을 꺼냈다.
"너, 나랑 계속 만날 수 있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