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픈 것이라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아마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크기와 무게는 사람마다 달라서 연인 사이에도 서운함이 발생하고, 우리는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속설과도 같은 말이 참 듣기 싫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쓰고, 맞는 말은 듣기 싫은 법이니까 말이다. 나의 사랑도 크고 너의 사랑도 큰데, 나의 사랑이 너의 사랑보다 조금 더 작을 때. 반대로 너의 사랑이 나의 사랑보다 이만큼 작을 때. 그때 우리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불편하게 토로하는 섭섭함이나 상실감이 싫었다. 우리가 느꼈던 그 '서운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싫었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 하나가 상대방에게 매달리는 듯한 기분이 싫었고,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사랑과 너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일까.

왜 늘 사랑은 누구 하나가 져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왜 사람의 마음은 다를까. 너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의 크기는 왜 다를까. 사람마다 사랑의 크기가 같다면 우리는 지금도 아이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한다.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은 서로 좋아야 시작하는 것이 일종의 합의와도 같지만, 이상하게도 살아가다 보면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경우도 있고 나를 '더'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만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합의는 합의일 뿐, 정해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 마음에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규칙이 있다고 한들 사랑은 늘 예외 경우를 만드니까. 또, 어떤 사랑은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얼떨결에 시작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랑에서도 상대방에게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때 생긴 감정은 '사랑'보다 '정'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한 사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 상대방이 입는 상처의 크기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아무튼 사랑을 시작하는 데에는 이처럼 다양한 '감정의 크기'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일종의 '사랑 비교'를 할 때에 빼먹을 수 없는 사람이 둘 있다. 정과 최. 둘은 모두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과 최 각자가 내게 미친 영향의 크기가 다를뿐더러 이별 당시 내가 느꼈던 슬픔의 감정 크기도 달랐다. 이 둘과의 사랑 이야기를 길게 다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둘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세월이 흐르고 감정이 무뎌져 이제서야 당시보다 객관적인 자세로 펜대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는 스물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어떤 사랑에 왜 빠지게 되었는지. 이 글을 열고 또 닫으며 정답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한다.


그해 봄, 정을 처음 만났다. 특별한 생각도 없이 놀러 간 친구의 대학에서 처음 본 정은 나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다. 첫인상이 강렬했다. 정은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있었다. 물씬 느껴지는 청순함과는 달리 흡연구역처럼 보이는 정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고 '너와 같은 신입생이냐'는 질문을 친구에게 건네니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우리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은 같은 과 선배'라고 답했다.

어떤 '사건' 때문에 휴학을 좀 길게 한 탓에 이제야 삼 학년 일 학기를 수강한다던 정은 나이를 몰랐다면 동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동갑 앞에서는 동갑이 나의 그리던 이상형이라고 말하고, 연하 앞에서는 연하가 내 이상형이라는 그런 사탕발림을 하며 살아왔는데, 연상 앞에서 내뱉는 그 말만큼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연상이 좋았다.

언제부터 연상인 여자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대충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다섯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이성과 스치기만 해도 반하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누구는 중학교로, 누구는 고등학교로 등교를 하던 그때, 옆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들을 버스에서 볼 때마다 알게 모르게 마음이 생기고, 괜히 옷에 땀 냄새가 날까 봐 걱정하고, 자주 보이는 누나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온종일 가슴이 뛰고. 그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상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니다, 언젠가 나의 첫 키스를 가져간 사람이 나보다 두 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정을 만났다. 그때 정은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그리던 이상형적인 연상보다 훨씬 더 연상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살 연상을 생각했던 내게 다섯 살은 상당히 큰 나이 차이였다. 이십 대 초반의 다섯 살 차이면 뭘 해도 안 될 사이 아닌가. 정의 입장에서 바라본 나는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속된 말로 젖비린내나 풍기는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만 같아서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다. 걱정과는 달리 정과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사실 우리의 접점이라고 하면 지인이 겹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찾을 수 없었는데, 오히려 정이 내게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편견에 불과했다. 우리는 고향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전공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갈 길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듣는 음악이 다르고,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지만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겹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정에게는 아이 같은 모습이 있었다. 어떨 때는 동갑내기와 노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가끔은 내가 연하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은 아이 같았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애 같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당시만 해도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는 많게만 느껴졌는데, 그 나이를 지나 보니 그리 대단한 나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며 당시 해맑고 어렸던 정의 모습도 이해가 되었다.


나의 친구와 나, 그리고 정 이렇게 셋이서 종종 만나 노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가끔은 정의 친구들도 우리와 함께 놀곤 했는데, 그때 정의 친구들을 볼 때면 정과는 또 다른 연상 느낌이 들어서 괴리감이 들곤 했다. 정과 우리는 '대학생'이라는 최소한의 접점이 있어서 어울리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정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거나 진작에 취업하여 돈을 벌고 있는 '사회 초년생'들이었기 때문에 고작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서슴없이 다가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회 초년생들의 입장에서 굳이 풋내나는 대학 신입생들과 어울릴 이유도, 어울려서 논다고 한들 얻을 만한 것도 없기 때문에 나는 눈치껏 거리를 두었다. 한참 무리를 지어 만나다가 우리는 따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정과의 나이 차이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나서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과제를 핑계로 대화를 나누고, 다음 날이 공강인 날이면 만나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나눈 대화와 심오한 철학적 고찰은 다음 날 술이 깨기 무섭게 사라졌다. 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라 가능했던 것들 아닐까. 젊음은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우리는 주말에도 만날 구실을 찾아서 영화를 보러 가고 산책을 했다. 같은 학교 동기들과 어울리지 않고 다른 학교 다섯 살 위 선배와 어울리다 보니 학과 생활에는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당장 사귀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였지만 마음 고백을 먼저 한 쪽은 오히려 정이었다. '누나가 드라이브시켜 줄게'라는 말에 평소처럼 후드티 하나 대충 걸치고 나간 그날, 정은 나를 영종도로 데려갔다. 기껏해야 동네나 한 바퀴 드라이브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영종도는 처음이라, 아니 인천에 올 일이 없었기에 인천 자체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나와는 달리, 정은 그곳에 자주 와 본 듯했다. 우리는 차에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잘 보이지도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워했다. 내가 내 숨소리를 의식하고, 정이 정의 숨소리를 의식하고, 몇 초 참았다가 내쉬는 그 불편한 기류가 느껴졌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거기서 정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