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선보였던 정과 최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추억 놀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든다. 스물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는 스물은 참 아름다웠고 그에 걸맞은 다양한 경험도 해 보았다고 자부하지만, 또 막상 글에 녹이려 하니 당시에 비해 생생한 감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뿐더러, 인스타그램이라는 제한된 페이지를 통해 글을 선보이다 보니 분량적인 부분과 표현적인 부분에 있어서 자기 검열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계속 쓴다. 내가 나의 글을 쓰며 추억에 젖어 들고 내가 나의 글을 읽으며 잊고 살던 기억을 끄집어올린다.

그러면서 '아, 이 내용도 넣을걸' 후회하기도 하며, '이런 일도 있었지' 하며 감상에 젖어 들기도 한다. 아, 어쩌면 이러한 일종의 사랑 회고록은 계속되어 내 젊은 날의 초상이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꼭 해 보고 싶은 '장편 소설급' 정도 되는 글의 초고 뭉치나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 장편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적당히 괜찮은 주제를 잡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다시 한번 빠져 보려고 한다. 풋내나고 치기 어린 그해 여름으로.


일전에 언급했던 나의 스물에 태풍처럼 몰아친 그 두 번의 사랑이 끝나고, 나는 불나방처럼 사랑에 뛰어들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건 잘된 일이었는데, 직전 학기에 개판을 치고 학사경고를 맞기 직전이었던 성적을 교내장학금을 받기에도 거뜬한 정도까지 올렸으니 뭐, 나름 학창 시절에 공부 좀 했다는 아이들이 모인 대학에서 내가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친 것이 잘 느껴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사람 일이라는 게 참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담을 쌓고 지내던 나의 학과 생활은 사계절과는 거꾸로 돌아가는 듯했다. 봄에는 한껏 굳어 있다가 여름이 되니 좀 물러지고, 가을과 겨울이 되어 외투를 입어도 한기가 들 이른바 '공강 시즌'이 되니 비로소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과 동기나 선배들은 종강을 하면 본가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다 오든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나는 좁지만 안식처와도 같은 자취방에 머물기로 했다.


본래라면 공덕역 갈빗집으로 다시 돌아가 두 달 정도 몸을 갈아 넣어 돈을 벌어 올 생각이었지만, 몇 번의 술자리 끝에 가까워진 학과 선배들 덕에 길고 긴 겨울방학 동안 교수님의 허드렛일이나 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 고깃집 일에 비하면 그 벌이가 짭짤한 편은 아니었으니 업무 강도나 신체 피로도 측면에서 본다면 고깃집 산하 막노동꾼이 될 바에야 교수님의 하인이 되는 편이 나았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 시시콜콜한 사랑놀음 따위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였으니 적은 벌이로도 충분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해 겨울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전부다. 나는 정말 그 겨울에 사랑 한번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성과 단둘이 만난 적도 없으니 한동안은 얼마나 이성과 단절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료한 듯 보이지만 나름 건강하고 바쁘게 살았고, 인생에 있어 잘못 끼워진 단추들이 다시금 올바르게 맞추어지고 있는 듯해 하루하루가 상쾌했다.


나는 꽤 오래전, 그러니까 블로그라는 것이 지금처럼 너도나도 하는 유행이 아닐 적에, 일기장 혹은 회고록의 개념으로 블로그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다 글을 쓴 지 하도 오래되어서 내가 무슨 내용의 글을 썼는지에 대한 기억 자체를 도려내듯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나 덧붙여 보자면, 당시 내가 사용하던 블로그 닉네임이 '성북구글싸개'였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내 블로그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곱 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휴대폰 알람이 울리며 화면이 켜졌다. 아직도 그 시간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6시 28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락이 올 만한 곳이 없었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내가 일전에 써 둔 게시글에 댓글이 달렸던 것이었다. 철없던 시절에 배설하다시피 올렸던 게시글에 '비판'이나 '평론'적인 댓글이 달렸으리라 미루어 짐작하고 댓글을 확인해 보니 이러했다. 글이 마음에 들어요. 사실 마음에 드는 글도 있고 아닌 글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글이 더 많아요.

마지막 업로드가 2년 전이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에요.


김유은. 유은. 그러니까 내 삶을 이렇게나 저렇게나 논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수 없는 사람, 내 20대 극초반의 청춘 단막극을 쓰는 데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당시 그토록 좋아하고 닮고 싶어 우러러봤던 너로부터 참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나 냉정하고 뒤끝 하나 없어 보이던 네게도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며, 발견하고 좋아했던 날들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무치게 그리운 우리 젊음의 단편이다. 사람들 모두 가슴속에 묻고 사는 인연 하나씩은 있듯 내게는 유은이 그런 존재다. 여태까지 지난 인연들에 대한 글을 쓸 때, 허락 따위는 구하지 않고 써댔지만, 유은에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다시 연락이 닿는다면 이 부분에 대해 꼭 허락을 구하고 싶었고, 내가 지금 유은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결과가 긍정적이었다는 말이겠지. 김유은. 김이라고 칭하기에는 특색이라는 것을 찾기가 어렵고, 가명을 쓰자니또 도무지 정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 내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도 된다는 너의 허락을 구했으니 너의 이름 한자 하나를 '동음어'로 바꾸어 정성 담긴 가명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러나저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 둘만 알고 있을뿐더러, 내가 이렇게 언급한다고 한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자의 어떤 음이 바뀌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다.


다시 그 댓글을 확인했을 때로 돌아와서. 내가 블로그에 글이라는 것을 기록하곤 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던 터라 그 댓글은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고작 공부만 하면 되는 대학생이 바쁘다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기기는 하지만, 나름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나질 않던 시기라 글쓰기를 위해 펜을 잡기는커녕 휴대폰 메모장조차 켜지 않은 지 오래였다. 사실 그 댓글을 남자가 작성했더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처음에는 댓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내가 쓴 글과 댓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는 그 댓글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그 사람의 글을 몇 개 읽어 보았다. 그 사람이 바로 유은이다.


유은의 블로그에는 '집중해서' 읽을 만한 글이 있다거나, 엄청나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유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블로그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써 본 적 있는 '몇 문 몇 답'이나 '자잘한 일상' 따위가 그녀 블로그에서 그나마 건져 읽을 만한 콘텐츠였다는 말이다. 블로그를 구경하다 유은의 사진이 나온 게시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크고 동그란 눈에 미소가 참 아름다웠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들 휴대폰을 보다가 아름다운 사람을 본다면 '오...' 감탄 한번 하고 지나가듯 말이다. 그 사진 한 장만으로는 내가 유은에게 빠져들 이유도 명분도 충분하지 않았다.


무심코 나타난 어떤 사람은 내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날 이후 유은이 계속 떠올랐고, 나는 몇 번이고 그녀 블로그에 들락날락하며 구경했는지 너는 모른다. 허나, 그때까지 내가 유은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정욕(11원)인 줄만 알았다.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문학에 관심을 가져 주니 괜히 혼자 설레발을 치는 것은 아닐지, 괜히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아닐지 혼자 고민했다. 참 웃긴 것이 우리는 길고 긴 겨울방학이 지나 대학이 다시 개강할 때까지 그렇게 지냈다는 것이다. 유은이 새 글을 올리면 나는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달려가 댓글을 남겼고, 글을 안 쓴 지 오래였던 나는 당신 보란 듯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았다. 서로 댓글을 달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본명을 부르거나 말을 놓는 일이 없었다. 또, 사적으로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낯간지러워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꼭 '누구누구 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누구누구'라는 부분에 서로의 필명을 넣은 채 말이다. 나는 성북구글싸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은 나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유은의 새로운 글이 언제쯤 올라오나 기다렸고, 내가 새 글을 올렸는데도 유은의 댓글이 달리지 않으면 괜히 초조해졌다. 이 사실 또한 당시에는 부정하고 싶었는데, 나는 얼굴 한번 실제로 본 적 없는 너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응 부탁이라는 게 뭔데?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어. 좋은 기회가 생겨서 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있어.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마무리짓게 된다면 너와 있었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어서. 새로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을 너로 삼아보고 싶다는 말이야. 사실 말하지 않고 그냥 써도 되지만 너한테만큼은 허락을 구하고 싶었단다. 그래~ 읽는 재미가 있겠다 기대할게. 아, 원하는 가명 있니?

글쎄. 너의 센스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