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만나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기로 한다. 내 눈에만 예쁘고, 내 눈에만 잘생겨 보이는 콩깍지에 씌었을지 몰라도 그게 무슨 큰 대수인가.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지. 연애를 시작하면 손을 잡고 싶은 감정이 자연스레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손잡는 건 이제 당연한 듯 여겨진다. 처음에는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가도 손 한번 잡아 보고 나면 안아 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러다가 포옹이라도 한번 하고 나면 입맞춤까지 상상하게 되기 마련이다. 입맞춤을 어찌저찌 한다면 키스가 궁금해지고, 키스까지 하고 나면 자연스레 함께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적인 사랑 표현 따위로는 도저히 감정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무언가 격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잠자리에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사랑. 연인들이 싸운 뒤 잠자리를 할 때도 빠짐없이 주고받는 말이 있다.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랑하기로 한 사람과 처음 잠자리를 가지며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을 때, 그때 드는 희열과 행복함은 감히 문장으로 서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사랑의 집약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형상화하여 본다면 그것이 곧 섹스인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사랑은 곧 성욕이라고. 철학에 대해 깊게 설명하다 보면 글이 무거워지고 지루해지다 보니 배경은 생략하고 결론과 핵심 문장만 가져왔다. 나 또한 모든 사랑에는 성욕이 전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성적인 끌림을 받아야 건강한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물론 사랑에는 여러 양상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부모-자식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랑, 인간-동물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랑, 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대상은 남자-여자 사이의 사랑이다. 만약 성적인 끌림이 전제되지 않은 남자-여자 사이의 사랑은 우정 혹은 가족 간에서 볼 수 있는 사랑과 어떠한 점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랑에는 섹스 • 섹스어필 따위가 전제된 것이 맞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떠오른다. 결국 한 쌍의 연애를 하다 결혼하게 된다면, 가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는 쾌락적인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이 다시금 피어나는 것일까. 사랑에는 섹스가 전제되는 것이라면 섹스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섹스는 어떠한 형태로 몰락하게 되는가. 이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한참을 물었던 적이 있다.
내던진 수많은 질문 끝에 내렸던 결론은 바로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사랑이 있는 섹스가 진정한 섹스'라는 것이다.
캐주얼하고 개방적인 섹스가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요즘 세상에서는 '섹스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평생 몸을 아끼다 죽을 거냐고 말하며, 순결이라던가 정조 같은 개념은 고지식하고 버려야 할 과거의 잔재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섹스는 대단한 것이 맞다고. 사실 섹스의 목적과 본질은 생식 즉, 자손 번식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번식의 목적보다 쾌락의 목적으로 섹스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행복과 쾌락을 위하여 섹스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다르다. 나의 섹스에는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말이다. 목적과 초점이 행복과 쾌락에 맞춰진 섹스라고 한들,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다는 말이다. 매체에서 보여지는 캐쥬얼 섹스는 후유증을 낳는다. 불안해하고, 후회하고, 아파하고, 본인에게 환멸감을 느끼고. 결국 몰락 혹은 자멸로 이어지는 불건전한 관계.
그러면 사랑은 뭐 안 아프냐고 하겠지만, 과정에 아픔이 있는 것과 결과에 후회와 아픔이 있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다는 말이다.
섹스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에게 섹스란 상대방을 너무나 사랑해서, 사랑한다는 말로 부족할 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와도 같다. 미래를 함께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함께라면 뭐든 좋을 것 같은 사람과의 섹스는 하는 중에도, 후에도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무턱대고 '콘돔'만 끼란다고 해서 건강한 성교육이 되지 않는다.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사람과 수많은 성 경험을 해도 '콘돔'만 낀다면, 피임만 잘한다면, 그건 진정 건강한 섹스라고 볼 수 있는가. 바람직한 성교육은 바로 이러한 섹스의 본질과 섹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값진 것들을 진솔히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시대에는 개방적 성이니, 뭐니 하며 다소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 사상들이 판을 친다. 또, 정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채 여물어지지 않은 미성년자들이 이러한 정보를 접하게 되니,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당신에게 섹스란 무엇인가. 그저 쾌락만을 바라보는 일종의 게임이라는 말인가?
육체와 상처와 꽃과 미. 꽃이 잎과 줄기와 향기로 꽃밭을 몸 안으로 잡아당기듯 꽃이 꽃밭의 육체를 잡아당겨 젖가슴을 내놓고 가랑이를 벌리듯 꽃밭의 꽃이라는 꽃은 모두 손에 잡히는 세계를 몸속으로 몸속으로 밀어 넣듯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 현실인 말은 오늘도 오규원, 「말」 "꽃은 아름답다는 편견 때문에 꽃은 아름답지 않다. " 오규원의 시를 평론한 김현의 말이다. 꽃은 아름다운가?
나는 주어를 바꾸어 다시 질문하고 싶다. 사랑은 아름다운가?
우리의 몸은 아름다운가?
시는 아름다운가?
섹스는 아름다운가?
대개 사랑은 아름답다고 하는 반면 섹스는 그렇지 않다고들 말한다.
전자는 '순수한' 느낌인 반면 후자는 '쾌락적인' 느낌이 습관적으로 든다. 또,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애-결혼 모델의 직선이 떠오른다. 섹스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상과 퇴폐를 오가는 문란한 곡선이 떠오른다. 예쁜 나선의 곡선이 아닌 바닥에 마구 난잡하게 뿌려진 머리카락 같은 그런 곡선. 순결과 불결, 순수와 난잡, 사랑과 섹스와 같은 이러한 대립쌍들은 플라톤적이면서 동시에 반플라톤적이다. 전자는 이 대립이 의도적으로 '순수는 좋은 것, 불결은 나쁜 것' 식의 우열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는 우리는 한낱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한 순수' 또는 '완전한 사랑' 같은 이데아적 가치를 절대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니체가 망치를 들고 기존 서양철학을 깨부쉈듯이, 후자라는 '현실'이전자라는 '이상'을 깨부순다. 그리고 그 깨부숨의 현장을 마치 르포하듯이 그려낸 시인이 바로 여기 있다. 오규원이라는 시인이다. 그의 몇 시문과 함께 '아름답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을 몸 전체로 느껴보자.
"아름다운 것은 결국 상처가/날 수 있는 나와 너의/살아 있는 육체구나", "사랑에는 길만 있고/법은 없네",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송충이는/모두 저렇게 아름답다/(...)/(송충이의) 보송하게 살이 잘 오른/가슴이며 아랫도리는 르누아르의/화풍이다 보라", 「송충이」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시라고 하면 안 되나/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엉덩이를/시라고 하면 안 되나/나는 내가 무거워/시가 무거워 배운/작시법을 버리고/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버스 정거장에서」 우선, 우리는 다시 이 질문을 해야만 한다. 꽃은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우리의 미학을 크게 뒤흔든다. 꽃은 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괜한 심술을 부려 꽃을 삐딱하게 보기로 했다. 니까짓 게 얼마나 예쁘겠다고, 흥. 자, 꽃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보자. 즉, 아름다웠던 것을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고 해보자. <꽃>을, 아무 편견 없이 <그 자체>로 바라보자.
이상하다. 원래라면 느껴졌던 '아름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색채, 명도, 조화 등이 모두 따분하게만 보인다. 사실 노점의 빈 의자, 노점 주인 여자, 뛰는 남자의 엉덩이, 이 모두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대상은 아니었다. 눈여겨볼 가치도 없거니와 '시'가 될 수도 없었다. 또, 꽃이 젖가슴을 내놓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꼴은 숭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섹시하지 않고 그저 추하다. 그래서 꽃은 잡초나 다름없게 보인다. 실제로 흑백의 세계라면 꽃과 잡초는 구별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음?
그러면 꽃이 아름답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학습된 것 아닐까?
"잡초는 아름답다"를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면, 우리는 잡초를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응?
아름다움의 기원이란 대체 뭐지?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 "시는 아름다운 게 과연 맞을까? "
꽃처럼, 늘 아름다웠던 것은 아름다움에 더 이상 절박하거나 애절하지 않다. 반대로 한 번도 아름답지 않았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에 큰갈증을 느낀다. 아주 강렬하게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그것이 삶의 목표인 것처럼 아름다워지고자 투쟁한다. 그것들은 무엇과 투쟁하는가?
미(美)?
추(醜)?
아니면 자기 자신?
그래서 나는 오히려 미학을 뒤집는다. 한 번도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야말로<늘 아름다웠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닐까?라고. '버스 정거장'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소한 일상들이야말로 실은 활달한 에너지를 가득 담은 시적 생명체들이 아닐까?라고.
아름답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의 아름답지 않음. 추(醜) 속의 미(美)와 미(美) 속의 추(醜). 서양철학의 유구한 이원론을 이 새로운 미학은 그 대립을 서로 뒤섞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포용적이고 변증법적인 일원론이 어디서 왔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노자와 장자,즉 노장(老莊)이다. 나는 노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가미비상미(美可美非常美) 화가화비상화(花可花非常花)"
아름다운 것은 늘 아름답지는 않다. 꽃은 꽃 아닌 것으로 바라볼 때 더 꽃답다. 미 속에도 추가 있고 추 속에도 미가 있다. 자신은 '절대' 추하지 않으며 자기 안에도 절대 '추함'이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자는 과연 알까?
확신의 찬 말일수록 그 호소력은 약하다는 것을. 다만 나는 추가 미보다 더 '좋다 또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규원이 말하는 상처 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미와 추의 공존과 합일, 바로 그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
(깨끗한) 몸은 아름답지만 상처는 더럽다(혹은 부끄럽다). 상처를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면, 상처 난 육체는 순결을 잃은 몸이다. 불순하고 불결한 몸, 지금껏 죄악시되어 오지는 않았나?
'우리는 깨끗한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지는 않았나?
오규원은 우리의 불결한 몸이야말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쾌락적 섹스는 분명 상처를 불러온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그 상처는 자기 혹은 서로의 기억 속에 부끄러움이라는 덩어리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욕망의 덩어리가 자기 안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불교에서도 그 덩어리의 비존재 자체를 최고로 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덩어리의 존재를 포용하고 감싸안으며 그 속에서 슬피 우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최종적으로는 '비워내는' 것이다. 이미 쌓여진 덩어리를 한없이 부끄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은 결국 상처가/날 수 있는 나와 너의/살아 있는 육체'다. 욕망의 부산물인 상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삶 전체가 욕망의 덩어리이면서 생명 활동의 증명이다. 대체 이 어디에서 '부끄러움'을 당연하게 느껴야만 하는가?
그런 정언명령의 당위를 넘어서, 삶을 오히려 옥죄는 도덕을 넘어서, '선악의 저편'에 있는 넓은 들판과 지평선을 바라보자. 대자연이 우릴 반긴다. 칼바람이 불어와 내 뺨을 스쳐 피를 흐르게 해도, 그것은 나와 바람의 만남이다. 고슴도치를 껴안으면 조그마한 상처가 생기듯. 결국 오규원의 시가 말해주는 것은, 서로가 서로 불결하다는 걸 알고 또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 다 같이 함께 부둥켜 뛰노는 현장이다. 어느 하나만 순결하거나 순결한 척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아름답지 않기에 아름답다.
상처 난 알몸을 서로 부대끼면서 함께 눈물과 피를 흘리며 사랑하자.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