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고민을 한다. 고민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이를 먹으며 우리는 제법 가볍지 않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신을 괴롭게 하는 고민은 이미 수천, 수백 년 전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미 했던 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삶에 던지는 우리의 질문과 고민에 대한 답은 모두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명언과 격언의 대부분은 철학자의 입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안다. '철학'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머리가 굳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접하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 벌써 페이지를 닫고 릴스 탭으로 이동하려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철학은 그렇게 딱딱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글을 끝까지 한번 읽어 보면 좋겠다.

양산형 동기부여 영상이라던가, 유행하는 위로형 콘텐츠를 보는 것보다잘 쓰인 철학책 한 권 읽는 것이 당신에게는 더욱 도움 될 것이라 장담한다.


"나도 나이를 먹을까. 나도 아저씨가 될까. 나도 할아버지가 될까. 젊음은 영원하지 않은데. 나이 들면 어떡하지?" 현대 사회에서는 젊음을 너무나 고평가하고 있다. 물론 '젊음'이라는 것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할 가치 높은 순간이 맞지만, 결국 젊음은 찰나의 순간이고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젊음을 지나치게 성역화해서는 안 되며, 늙음을 더러운 것이라 치부하며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 청춘이라 불리는 시절도 결국에는 다 지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늙어가는 것은 굉장히 좋지 못한 태도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은 나태함을 만들고, 나태함은 곧 도태를 불러일으킨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가 들어도 내 마음속과 내 머릿속에서 나는 여전히 스무 살이지만, 내 모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노년기에는 인생의 다른 어느 때보다 내면과 외면,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의 내면과 외면에서부터 오는 괴리감 때문에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강하게 늙어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나이가 들어서도 내면 계발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다소 고집스러워질 수도, 지나치게 완숙해질 수도 있는 그 시기에 우리는 자연스러운 '늙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한 상태로 또 다른 경험을 하고, 또 무언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호전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몸과 머리를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멋지게' 늙을 수 있다.


"남들은 잘만 연애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사랑은 왜 항상 어려운 거야?" 사랑은 영혼의 질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소유욕과 자기 상실의 경험, 그러니까 그 병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거부하는 마법에 걸린 듯한 정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다. 또한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평소와는 달리 맹목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곤 한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곤 한다. 이게 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게 되면 세상에는 '나'와 '상대방'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 남는데, 그 뜨거운 열정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열정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불안으로 평생에 걸쳐서 우리를 괴롭힌다. 사랑할 때 우리는 그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질투하게 되고, 다투게 되고, 또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 또는 소설을 읽으며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노래하지만, 사실 사랑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라 철학자다.


칸트는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먹고 싶어 하는 (eat) 것이다'라고. 플라톤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늑대가 어린 양을 바라보듯 사랑하며, 포식자의 '애정'으로 상대를 욕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격정적인 키스를 하며 서로를 집어삼키고 서로를 갈망하며 한 몸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식인'과도 같다고 보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사랑의 본질은 야만이며, 이러한 감정은 원나잇과 같은 가벼운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랑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연인들이 싸우는 이유는 뻔하다. 질투, 바람, 배신, 복종, 격정의 사그라짐,등. 이런 자잘한 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칸트는 이러한 열정의 야만성을 통제하는 대안으로 '결혼'을 내놓는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열정의 야만성을 문명화하고 길들인다. 결혼은 부부가 서로를 자신만의 의지와 감정을 가진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성관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계약이며, 이를 통해 성관계는 법적으로 통제되고 제한되기에 보다 통제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에'만' 집중하면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쾌락의 노예로 살기는 싫지만 오늘도 나는 배달 음식을 시키고 릴스를 보고 포르노를 본다. 그놈의 쾌락이 대체 뭐길래?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다. 다이어트는 늘 실패한다. 이제 포르노를 끊어야지 생각하지만, 내일이면 다시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간다. 금욕하겠다던 사람의 다짐은 3일을 채 못 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릴스 그만 봐야지, 쇼츠 그만 봐야지, 언제까지 이런 순간적인 쾌락에 빠져 살래, 자책하곤 한다. 다짐과 자책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우리는 잠들기 전, 또 인스타에 들어와 릴스를 본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쾌락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쾌락을 느낄수록 더 큰 쾌락을 좇는다. 그래서 우리가 쾌락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쾌락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며 인간을 공허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삶은 '물이 새는 항아리'와도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공허해진다." 쾌락에서 벗어나겠다고 해서 속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금욕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고 옳지 않다. 「이방인」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작가 알베르 카뮈는 삶이 쓰라리고 실망스러울지라도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때 비로소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때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포르노를 보고, 자위하고, 섹스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릴스를 볼 때 느끼는 그런 행복과는 결이 다르다. 본연의 '나'로 돌아가서 나의 심오한 본질을 되찾아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간단한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곤 한다. 정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회피하고, 내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타인의 눈치를 보고, 내 생각을 검열하고, 내 생각을 타인에게 '확인'받고. 어쩌면 그런 당신에게 철학은 꼭 필요한 학문이 아닐까. 깊은 사유의 늪에 빠져 생각을 정립하다 보면, 당신은 지금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까. 또,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로랑스 드빌레르 「철학의 쓸모」 —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 사용 설명서. 박효은 옮김. 인간은 한 번만 살기 때문에 철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