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꺼내는 첫사랑 첫사랑, 이름조차 아련하고 예쁜 이 단어는 나의 모든 원칙들의 예외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령 나는 원래 감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사랑 앞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는 뜻이다.

무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사고처럼 찾아온 나의 필연적인 첫사랑. 늦봄이었던 시기에 한여름 냄새를 한아름 품고 다가온 그 사람에게 나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 시선은 계속 그의 그림자를 쫓게 되었고, 그러다 가끔씩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는 그 애의 미소로부터 첫사랑의 향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언덕에서 굴러내려 오는 눈덩이는 멈출 수가 없다. 그처럼 처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생각보다도 더 빠르고 강렬했다. 누군가 '사랑은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뇌의 화학작용'이라고 했던가. 그 말에 부합하게 그 애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을 도저히 이성 따위가 이길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탄산을 처음 맛본 아이처럼 강렬한 첫사랑의 끌림에 휘둘렸다.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발라 본 딸기향 니베아 립밤, 곁에 머물고 싶지만 직접 말할 용기가 없어 괜히 그의 근처에서 빙빙 돌던 시간들, 어쩌다 연락을 주고받을 핑계가 생기면 그 대화창을 나가지도 못하고 몇 번을 고쳐 써서 겨우 보냈던 문자 하나, 돌아오는 답에 좌지우지되던 나의 하루. 이런 것들이 아마 어설픈, 그러나 분명한 사랑의 증거이지 않을까.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슬퍼 본 적이, 너무 행복하다 못해 눈물 흘린 적이 있는가. 나는 이것들이 사랑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경험하기 전까지 '설렘'과 '좋음'으로 규정하던 사랑이 이제는 여러 단어를 다 내뱉어도 담아낼 수 없는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첫사랑은 좋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로를 소중히 지켜온 그 여름이 아닐까.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으니까 그가 나의 여름이길 간절히 바라던 마음이 아닐까. 이제는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은 그가 여전히 웃고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빛나길 바라는 이 마음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서툴고 삐뚤거려도 이렇게나 예쁜 건 아마 '처음'이라는 수식어 덕이다. 처음이니까, 처음이라서.


당신이 풍기던 시트러스 향기는 당신의 미소에서는 늘 시트러스 오렌지 향이 났다. 미소에 향이라.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당신이 짓는 웃음에는 분명히 다정한 시트러스 오렌지의 향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싱그러운 여름 속에 살곤 했다. 그래. 이 향으로 우리 사랑이 시작되었다. 좋은 향이 나는 당신에게 내가 던진 그 말을 시작으로.

혹시 무슨 향수 써요?

냄새 되게 좋아서요. 당신은 순하고 어리숙한 웃음을 지으며 답을 흐렸다. 초면에 뜬금없는 질문을 받아 당황했던 것일까. 처음 본 사람에게 당신이 쓰는 향수를 알려 주기 싫었던 것일까.


당신에게 처음 말을 걸 때 들었던 확신처럼, 당신과 '남' 그 이상의 사이가된 나는 우리의 계절 내내 맴돌던 향의 이름을 알아냈다. 당신과 만나고 난뒤면 한 3일 동안은 당신이 내 곁에 있는 듯 향기가 진동했다. 짙은 향도 아닌데, 당신 자체의 향과 섞여서 참 다정하게 남았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모를 진한 포옹이라도 한 날에는 정말이지, 오묘하고 찬란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시트러스 오렌지 향에 푹 빠져 살았다. 비가 오는 저녁, 갑자기 우산을 접어버리고 내 손을 붙들며 달리는, 그러면서도 감기가 들까 걱정되어 따뜻한 음료를 손에 쥐여주는 당신에게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종종 그리고 문득, 그때의 향과 당신의 엉뚱한 다정함이 두려워지곤 했다. 서로의 향이 섞인 시트러스의 향을 사랑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나의 모든 것이 당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운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더 이상은 나와 당신을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당신이 사라진다면 나도 사라지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과 달리 당신은 사계절 내내 여전히 다정했지만, 나는 꽤 자주 불안에 빠졌고 그렇게 우리의 여름이 끝나갔다. 결국 봄이 추운 겨울을 이기지 못했을 때 나와 당신은 이별을 맞이했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의 다정함을 어릴 적 즐겨 먹던 알사탕처럼 입안에서 조금씩 녹여 먹곤 한다. 다정한 향을 내뿜으며 낮은 음성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던 "사랑해"를아끼고 아껴 조금씩 입에 머금어보곤 한다. 시간을 내달려도 당신의 잔향은 사라지지 않아서, 비슷한 향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그해 여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시트러스 오렌지의 향을 머금은 당신의 미소가 여전히 내 앞에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나의 감각들을 비웃듯 오랜만에 꺼내 먹은 사탕에서는 씁쓸한 맛이 났다. 그러고는 당신이 풍기던 시트러스 오렌지의 향이 또 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