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랬다. 동네에서 처음 본 친구와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떠들며 놀곤 했다. 당시 나는 나름 괜찮은 동네에서 살았다. 조경에도 꽤 신경을 쓴 탓에 동네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고,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몇 마리 살고 있었다. 당시 내게 그런 연못은 꽤 신비스럽고 신성하게 다가왔다. 동화 속에서나 볼 수있을 법한 그런 공간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잉어를 바라보며 가만히 '물멍'하는 것이 내 삶의 낙이었다. 타인의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이 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찝찝함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하루는 모르는 언니 하나가 내가 먹던 더블비얀코를 한 입 달라고했다. 뭐,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늘 꾹 참았다. 더블 비얀코의 윗부분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아랫부분에 깔린 샤베트를 좋아했다. 그 샤베트 부분을 먹기 위해 더블비얀코를 사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때도 바닐라 부분을 겨우 다 먹고 드디어 아래에 깔린 달콤한 샤베트를 먹을 타이밍이었기에 한 입 주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심 쓴다는 느낌으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 언니는 숟가락에 침을 다 묻히며 딱 '한 입'을 먹은 채 내게 아이스크림을 돌려주고 떠났다.

아, 씨*. 아는 욕이라고는 '씨*'이라던가 '개*끼'밖에 없던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리고는 '더러워진' 내 아이스크림을 연못에 내다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러워진' 연못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미정이의 아빠가 하늘로 갔다. 미정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무튼, 건너편 아파트에서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구급차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들리고, 누구는 토를 하고, 누구는 울었다. 사람들이 없는 담장 뒤에 숨어서 그 장면을 몰래 훔쳐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아, 바로 미정이의 아빠였던 것이었다.

별생각이 없었다. 미정은 자신의 아빠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미정의 말만 들어 보면 미정이 아빠는 못된 놈이었다. 아닌데. 나는 미정이의 집에 종종 놀러 가곤 했다. 언젠가 미정의 아빠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마주한 미정이 아빠는 미정이가 묘사했던 '나쁜 사람'과는 멀어 보였다. 그는 내게 미정과 많이 친하냐는 질문과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 사람의 주변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데, 자기는 자기 딸에 대해 잘 모른다고. 그래서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미정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당황한 나머지 당시에는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미정은 자신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며, 싫은 사람이 사라지기를 빌면, 그사람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애타게 빈 덕분에 본인의 할머니가 지옥으로 갔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단 세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사용했으니 남은 기회는 두 번. 그 말이 장난 정도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빠가 그렇게 싫으면 너네 아빠도 그렇게 해. 남은 기회는 우리 엄마에게 써 줘'라는 부탁을 했다. 미정은 내 부탁을 듣더니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내 엄마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고 했다. 무서웠다. 말을 내뱉고 후회했다. 평소 같았으면 미정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나왔을 텐데, 그날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베개가 젖을 때까지 울었다. 편히 잠들지도 못했다. 진짜 엄마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엄마가 나를 혼내긴 했어도 그 정도로 미운 사람은 아닌데, 진짜 미정이 내 엄마를 없애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잠을 뒤척였다. 눈을 뜬 다음 날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그대로였고, 웃으며 나에게 밥을 차려 주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


미정이의 아빠가 멀리 떠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 다음 날의 아침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엄마와 아빠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대화 소리에 서둘러 방을 나와 내가 직접 아침밥을 차려 먹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나름 눈치 챙기는 척을 하려고, 혼자 시리얼을 말아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입을 열었다.

희조야. 우리 이사 갈 거야. 아빠가 회사를 옮기게 됐어.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엄마와 아빠는 내게 숨기는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내가 알 방법은 없었고,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른 일에 애가 뭘 그렇게 관심 가지냐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혼자 오롯이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불쾌하고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의 기분을 망치고 싶었다.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겨 주고 싶었다. 연못에서 내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달라고 하고, 나의 하루와 연못을 망친 그 언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그날은 가장 왜소하고 조용하여 존재감 없던 친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 소식 들었어?

내 집 근처 아파트에서 말이야, 꽝- 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봤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거 있지. 너 그런 소리 들어 본 적 있어?

그 사람이 눈을 뜨고 있었거든. 나랑 눈도 마주쳤어.

그 남자가 누구였냐면~! 내 이야기를 듣던 그 친구는 울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니 달래 줬다만, 나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는 것이 괜히 뿌듯했다. 대신, 그 대가로 나는 누군가와 꽤 자주, 그리고 오래 상담했다. 친구들이 자연스레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고, 미정이는 귀띔도 하지 않고 내 곁에서 사라졌다. 미정이는 내 엄마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는지 엄마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인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전에 엄마가 했던 '통보'와 달리 이사를 가지 않았다. 아니 그건 오히려 불행이었다.


친구들로부터 직접적인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친구들은 나를 피했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래도 나와 어울리는 친구가 두 명 있기는 했지만, 그 무리에서조차 나는 시원치 않은 취급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던 어느 날 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살 바에야 같이 멀리 떠나자 우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거야.


전날 내가 했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친구 하나가 다음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친구가 어디론가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겁이 나질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받아들였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시절이 끝났다. 멀리 떠났다던 친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반가운 인물을 마주하게 된다.

야, 너...

미정이었다. 미정을 다시 마주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