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졸업 대학을 졸업하며. 청춘 절반을 졸업하며. 그리고 사랑에 무지하게 힘써왔던 지난 나를 여기 두고서. 멀리 보내버리지 않고. 아예 여기 두고서 차라리 '내'가떠나면서. 나는 오늘 대학을 졸업하는 게 아니다. 청춘을 졸업하는 것이다. 지난 오 년 동안 쌓아왔던 모든 추억과 기억들, 희노애락의 감정들, 과오와 실수들, 충동과 욕망 그리고 내적 갈등과 인간관계의 그물망까지 나는 모두 이곳에 두고 떠난다.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 얽히고설켜 있는 이 모든 과거를 졸업한다. 졸업. 그 말은 분명 무언가를 <마쳤다>는 뜻이다. 생각해보자. 나는 무엇을 마쳤을까?
대학?
청춘 절반?
사실은 막걸리 누룩마냥 그 아래 더 진하게 갈린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졸업은 그것을 '그곳에 둔다'. 부끄러운 과거를 아예 청산한다든지 치워버린다든지 아니면, 멀리 보내버린다든지 하는 적극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말라비틀어지든지 아니면 썩어빠진다든지 하도록 그대로 둔다. 뭐?
매정해 보인다고?
그럼 나는 당신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건조 혹은 부패'와 '박제' 중 무엇이 더 '자연'스럽냐고.
바다 전체를 주름잡던 바다의 왕 '고래'는 죽어서도 그 사체를 바다 시스템에 환원한다는 자연 본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누룩을 건져 올려서 박제한 뒤,"이것은 나의 청춘입니다"하고 음흉한 본성을 숨긴 채 살아가야만 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나는 나의 추억을 이곳에 둔다. 그리고 차라리 '내가 떠난다'. '떠남'은 곧 '돌아옴'을 유도한다고 어느 문학 평론가는 말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나도 대학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긴 했지만, 분명 졸업 후의 마음은 무언가 달랐다. 걸리적거리던 것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대학생보다 더욱 대학생다운 마음으로 캠퍼스를 활보했다. 졸업은 곧 미련의 정화를 의미한다. 졸업은 말 그대로 이제는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현재는 과거에 잡아 먹혀 여전히 유급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내 졸업은 단순히 '대학에서의 졸업장 수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청춘을 유급하도록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졸업은 '청춘 졸업'이다.
'청춘'이라는 낯 간지러운 단어는 그 근저에 '성'의 자유로움을 두고 있다. 대학 입학 전까지 그동안 제도적으로마저도 억압받아 오던 성은, 청춘이란 이름 아래 스무 살 즈음부터 우선 제도로부터는 해방되기 시작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고 또 그러므로 두려우면서도 궁금해 마지않는 그런 성 말이다. 청춘에 "봄"이 들어간 까닭도 비슷한 맥락일 성싶다. 그런 점에서 나의 지난 오 년을 여러 독립적인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유로운 성을 찾아 나서는 돈키호테"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자유는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은, 즉 자기 자신에게 의미의 근거를 두었다는 점에서 자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성'이란 그렇게 학문적이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은 그 중점쯤에 있다고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엽 내게 사랑은 '연애와 동의어'인 줄 알았고, 그래서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연애하고 싶다'로 그대로 직역되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나는 사실,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상야릇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반드시 연애를 해야만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라고 김승옥 문학과 학문의 즐거움, 그리고 고독을 접하면서부터 내게 '사랑은 육체적 관계'였다. 물론 이것도 단순히 삽입만 의미하는 것은 또 아니겠지만. 다만 모든 육체적 관계는 삽입을 모티브로 두고 있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아,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말과 무엇이 달랐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랑이 곧성욕이라고 해버린다면, 내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사랑의 감정과 연애사는 어떻게 되어버리는 건가?, 라고. 분명히 성관계 이전에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소위 '썸'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 나도 겪었었는데 그것은 저 명제 아래에서는 분명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썸도 연애의 한 종류지 않나! 나는 썸도 하나의 사랑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론 나는 사랑이 지닌 다채로움을 칙칙하고 따분하게 만들어버린 것에 불과했다.
마침내 지금의 내게는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사랑은 가히 도처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충분하고 영원한 설명이나 근거를 댈 수 없다. 사랑은 사랑 자체다. 사랑은 머리나 몸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이 함께 어우러질 때, 사랑은 사랑이 된다. 나의 사랑사는-이를 연애사라고 해버리면, 연애하지 않고 있었을 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돼 버린다.- 충동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승화 • 타협해온 역사였다. 대학 시절 나는 나의 사랑이 사랑으로 보이지 않게끔 잘 포장해왔다고나 할까. 사실 자기를 속였던 것이겠지.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랑사마저도 졸업한다. 대학에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모두 이곳에 두고 나는 떠난다. 졸업은 '유급 탈출'이면서 동시에 '진급 기회'이다. 진급하려면 유급하지 않아야한다. 그래서 사실 졸업은 진급과 유급 사이의 행정적 절차에 가깝다. 나는 지난 청춘을 이곳에 두고 다음 무대를 향해 갈고 닦는다. 과거를 이곳에 두듯이 나의 미래는 저곳에 있는 것이다.
나의 대학은 내게 청춘이었으면서 동시에 학문의 즐거움을 깨달을 수 있게 한 중요한 무대였다. 학문이 내 인생에서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성찰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인생의 큰 방향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내내 정말 많은 독서를 했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연애가 아닌 사랑, 즉 단방향 사랑도 사랑이라고 친다면 그런 의미의 사랑도 정말 많이 했다. 나의 대학 생활을 술회해 봤을 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노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학문과의 사랑이다. 사람은 모두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나는 나의 대학과 청춘이라는 터널을 거치면서 이제 슬슬 터널 밖을 나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터널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다. 아,그렇지만 무척이나 설렌다. 사실 영원한 사랑이 거기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영원한 사랑을 찾아 나서는 나는 거기 있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떠돈다.
사랑을 찾아서.
작별론 "제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이탈리아어로 작별 인사가 무엇인지 아세요? ""아니, 당연히 모르지.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머금고 뱉으며 말했다.
"호호, '아리베데르찌'예요. 그런데 악센트를 리듬감 있게 줘야해요. '아리베-데-르찌'라면서 말예요. 한번 해 보실래요? ""아리베... 뭐라고? ""아-리-베-데-르-찌'아, '데' '찌'에 힘을 줘보세요. 통통 튕기듯이 말해봐요. ""음,아! 리베데-르찌!, 맞아? ""호호, 맞아요, 내일까지는 꼭 기억해주셔야 해요. 약속이에요! "
나는 이 언어의 작별 인사가 무척 양면적이라고 느꼈다. 대체 어떻게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이렇게나 유쾌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지?
영영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텐데?
반드시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확신하듯이, 신뢰감 있는 어조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작별 인사란 사실 하나의 희망 고문 같다고도 생각했다. '안녕, 잘 가'라든가 '굿 바이'라는 말도 사실 썩 쓸쓸한 느낌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작별을 일상 속에서 무지하게도 많이 겪어본 민족의 언어만이 헤어짐의 쓸쓸함을 가장 탁월하게 반영할 수가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내일 다시 외대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어머, 제가 외대생인 거 잘 기억하고 계셨네요?아 참, 약속 하나 더 해요. 음, 올해 내로 한국외대에 꼭 한번 오는 거예요. 와서 저랑 근사한 데이트를 하는 것이지요. 식사와 숙소는 제가 다 제공해 드릴 테니까 꼭 오기로 약속해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여자가 이태리어 전공이라는 게 방금 생각났을 뿐이다. '아리베데르찌', 내일 기차역에 다다랐을 때 다시 기억날 수나 있을까?
"그걸 약속해두면 내일 작별 인사는 '아리베데르찌'보다는 '굿 바이'나'씨 유 레이터' 정도가 좋을지도 모르겠군. ""에, 그러면 괜히 가르쳐 준 것 같잖아요, 안 돼요. 꼭 기억해서 내일 말해주세요. 전공자가 다시 한번 말할 테니까 잘 들어두셔야 해요. 한 번 더 말하진 않을 거예요. ""영어 듣기 시험을 보는 것만 같군""흠흠,'아리베-데-르찌.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정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 여자가 뱉은 '아리베데르찌'가, 물리적으로는 접촉 중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잠시나마 정신적 작별이 선고되는 것만 같았다. 영어 듣기 때 간헐적으로 '띵동- 하는 그찰나의 침묵. 이 여인숙에는 적막한 침묵과 서로의 야릇한 숨소리, 그리고 헐떡대는 심장박동만이 노골적으로 공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 말이랑 '아리베데르찌'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왜 작별 인사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단순한 궁금증이에요. ""이탈리아어의 작별 인사는 꽤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이군. 혹시 김승옥의 「다산성」을 읽어 본 적 있나?
러시아어의 작별 인사는 무엇인지 알아?
"아, 아뇨, 모르겠어요. 러시아어도 할 줄 아세요? ""아니 나도 저 소설에서 알게 되었을 뿐이야. 러시아어의 작별 인사는 바로 '다스비나니어'야. 이 말을 들은 느낌은 어때? '아리베데르찌'랑 비교해보면 어때? ""음, 러시아어는 처음 들어봐요. 제 느낌으로는 음. 이 여자는 눈썹을 이리저리 들썩이며 마치 적절한 표현을 찾겠다는 듯이 혼자서 제 입으로 작게 궁시렁거렸다. 나는 마지막 담배의 한 모금을 머금고 쉬이 내뱉었다. 다 스러져간 담배를 담배통에 꽂아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러시아는 무척이나 춥잖아요?
그러니까 좀 쌀쌀한 느낌이 있는 것같아요.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땅이 워낙 크니까 말예요. 다스비다니어, 다스비다니어, 음, 으슬으슬하네요. 그거 생각나요. 막 추워지는 겨울에 난로 가까이에 손바닥을 가져가고 있는 느낌이요. '다스비다니어'는 뭔가 그런 느낌 같아요. "
"역시 언어를 전공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언어의 뉘앙스를 잘 캐치하는군. '다스비다니어'를 입에서 잘 머금어봐. 저 시베리아 벌판과 그 위에 쓸쓸히 가지런히 놓여 있는 횡단 철도를 말야. 그리고 네가 말한 것처럼 역사에서 난로를 쬐며 상행 기차를 간절히 기다리는 두 남녀를 떠올려봐. 기적 소리와 수증기를 힘차게 내며 역사에 증기기관차가 들어서겠지. 두 남녀는 손을 마주 깍지 잡고서 서로의 눈빛을 무한 번 왕복하고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정말이지 그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서 눈물마저 금세 얼어버릴 것만 같은 날씨에 따사운 눈물 한 줄을 연하게 흘리고서는 감격의 포옹을 하겠지. 그러나 출차 시간은 안타깝게도 언제나 정해져 있단다. 이별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은 이제 그 끝을 기어코 마주하게 될 거야. 그리고서 남자는 이제 열차에 타오르겠지. 두 걸음 정도, 그러니까 역사에서 완전히 발을 떼고서 열차에 완전히 몸을 실어버린 그 순간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겠지. 역사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선 애써 고개를 돌리고 제 자리를 찾아 나설 거야. 열차 내에는 분명히 남자와 비슷하게 이별을 결심하고서 열차에 탑승한 이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는 듯해. 그리고 남자는 유리창 너머로 이 여자에게 애써 손을 흔들겠지. 정말이지 뇌가 아니라 근육이 애써 손을 흔들려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는데도 말야. 열차가 출발하고 이 남자는 여자의 모습이 저 시야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드디어 겨우 참아두었던 눈물을 쏟아내. 엉엉.... 하고서, 겨우 진땀 빼며 내뱉는 작별 인사, 그 여자에게는 결코 육성으로 들리지도 못할 인사가 바로 '다스비다니어' 아니겠어?내 생각에는 '사요나라'도 비슷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배경을 떠올리면 어울리겠다 싶네. 아마도 '사요나라'는 북해도에서 하면 적당할 것 같군"
나는 내일 이 여자에게 전할 작별 인사로서 '다스비다니어'를 선택하겠노라 결심했다. 비록 육성으로는, 이 여자 앞에서는 '아리베데르찌'라고 하겠지만, 여전히 침묵과 고독이 가득한 내 자취방에서 수음을 거친 후에는 사실 '다스비다니어'라고 내뱉고야 말겠지. 나는 육체로는 '아리베데르찌'가 적당한 작별 인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장난스레 '사요나라' 정도는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 나는 전 세계 모든 언어의 작별 인사를 한가득 모아서 두꺼운 회화집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도서 분류 기준마냥 언어별로 유쾌함, 무덤덤함, 쓸쓸함이라는 세 척도로 작별 인사말들을 전부 분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언어들의 작별 인사를 확인해두어야만 할 것같았다. '안녕 잘 가, '굿 바이','사요나라', '밍 찌엔', '취스', '다스비다니어', '아리베데르찌'... 우선 유쾌함의 끝에는 '아리베데르찌'를, 무덤덤함의 끝에는 '밍 찌엔'을 놓고서, 쓸쓸함의 끝에는 그 선택에 있어서 내적 갈등을 무척이나 겪을 것만 같았다.
그럼 그것은 제쳐 두고, 내친 김에 내가 이름만 아는 언어들의 각 작별 인사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몽골어니, 베트남어니, 스와힐리어니... 결국 '작별어전집'을 낸다고 했을 때, 나는 한국어의 '안녕 잘 가'에 각주 하나 정도 달고 싶어졌다.
"한국어는 무수한 침략과 강탈, 그리고 정치적 혼란과 격동을 겪었음에도 그 언어는 상당히 무덤덤한 느낌이 난다. 나를 비롯한 한국어 화자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어의 감수성을 마음속에 깊게 아로새기길 바란다. 한국어의 성조와 억양은 두드러지지 않을지 몰라도, 사실 우리 한국인들은 한국어의 쓸쓸함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다'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라. 쌍기역이 주는 '무언가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은 된소리를 소유한 한국어만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쓸쓸하다'라는 말은 된소리를 두 번이나 이어 말함으로써 터져 나옴의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 이들로부터 한국어의 무덤덤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의 감수성을 무척 사랑하여라. 우선 나부터 그래야 할 것이다. "
나는 기나긴 침묵을 뚫고 이 여자를 꽉 껴안았다. 아니, 이 여자의 육체를 완전히 품었거나 혹은 덮었다. 얼마나 세게 껴안았던지 이 여자는 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겨우 냈다. 사실 '사랑한다'는 말 역시 무척 무덤덤하다. 사실 쓸쓸한 정도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말에는 그 어떤 된소리도, 거센소리도 없어 사랑이라는 감정의 강렬함과 정열을 담아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달콤하다' 혹은 '뽀뽀' 정도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연이어 키스했다. 이제 음성의 언어로는 더는 사랑을, 정열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육체의 언어로만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단지 이 사랑은 내 몸이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강력하게 육체의 언어로써 내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키스 이후의 사랑 표현은 엇비슷했다. 키스, 애무, 잠자리로 정형화되는 기계적인 왕복 운동처럼 사실 껍데기끼리의 격렬한 부딪힘은 여전히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의아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나는 힘껏 육체의 사랑을 나눈 후, 씻고 오겠다며 먼저 욕실로 나섰다. 내 몸에 묻어 있는 정액과 그것이 풍기는 육체의 썩은 냄새에 입을 틀어막으며 구토할 뻔했다. 나는 강력한 수압의 샤워기로 온몸을 씻어냈다. 오랫동안 씻었다. 내 몸에 달라붙어 있었던 욕망의 찌꺼기까지 뜯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일부러 머리까지 말린 후 방에 나섰다. 여자는 이미 곯아떨어진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나는 창을 향해 담배를 하나 태우며 다음 날을 생각했다. 작별 메시지를 고민했다. '다스비다니어'?
'아리베데르찌'?
하... 그 말을 아예 잊어버리고 싶었건만 기어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육체의 사랑도 사랑이라 할 수 있기는 하니까.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