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채 풀리지 않았을 3월 언저리쯤, 웹매거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고 사람들로부터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나를 보고 화가 너무 많다느니, 지나친 혐오를 하고 있다느니, 왜 굳이 다른 이들을 까내리는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 글이 업로드되고 대중들의 날카로운 화살촉이 나를 향했을 때도 별생각이 없었다. 내 생각이 옳았음을 알아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후회한 적은 없었다.


조금 있으면 벌써 24년의 마지막 분기, 즉, 4분기가 시작된다. 아직까지 연말이라 하기에는 이르지만 지금쯤 돌아보는 인스타그램 웹매거진 판은 어떨까. 정도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겠지만 다들 큰 포부와 야망을 가지고 뛰어든 시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일전에 내가 '혐오' 수준으로 비판했던 삼류 웹매거진 채널들은 하나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나를 '분노 조절 못 하는 방구석 정신병자' 취급했지만, 결국 삼류 웹매거진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는 말은 대중들이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는 의미니, 내가 옳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내가 틀렸고 그들이 여럿의 관심을 꾸준히 받았다면 지금까지 문전성시를 이루어야 하니까 말이다. 소비자 혹은 향유자의 입장에서 아직까지 아쉬운 부분은 많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문화 • 예술 • 여가 • 장소 등을 큐레이팅해 주는 채널이라던가 패션 • 트렌드 소개 채널의 경우 이 채널이 저 채널 같고, 저 채널이 이 채널 같다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든다. 다들 나름 시작은 하는데, 특색 있는 집 찾기는 어렵다.


글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책'보다 더 상위 개념의 '글'을 가져온 이유는, 책이 아닌 무언가를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를 읽든 소설을 읽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글을 읽든 간에,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모쪼록 긍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변만 봐도 책 한 권 안 읽던 사람들이 짧은 웹진에서 인상 깊었던 페이지나, 서점에 가서 예쁜 시집 구매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깊이 있는 문학인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모쪼록 향유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출판 업계를 비롯한 문학계에 긍정적인 신호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원래 글이라는 것이 읽다 보면 재밌고, 또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지고, 그러다 한번 써 보면 나의 형편없는 글솜씨에 실망하고, 멋들어진 문체로 과감한 문장을 써내리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게 되고. 그렇게 쓰고, 또 쓰다 보면 자연스레 글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은 쓰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운동을 처음 하러 헬스장에 가면 다들 러닝머신'만' 이용한다. 다른 좋은 운동 기구가 많지만, 다들 러닝머신만 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쉽고 만만하니까. 사람들은 비싼 돈 주고 커피 머신을 사 놓고 믹스 커피를 태워 마신다.

왜?

편리하니까. 마찬가지로 처음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은 흔히들 '에세이'라고 부르는 글을 쓴다. 본인이 겪은 일을 토대로 느낀 점을 서술하는 것이 가장 만만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쓸 만큼 문장의 호흡을 길게 빼지 못하고, 그렇다고 짧은 시를 건드려 보자니 더 어렵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에세이를 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에세이는 에세이가 아니다. 당신이 썼던, 당신이 읽은 에세이는 에세이가 아니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글 중 '진짜 에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글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서점에서 당당히 판매하고 있는 '에세이'의 대부분도 그저 그런 생각의 나열에 불과하다. 당신은 어떤 글이 에세이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에세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늑대와 여우도 같은 '개과(Canidae)'에 속하지만 다른 동물이듯, 수필에도 여러 갈래가 나뉜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이 '에세이'의 정확한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에세이의 상위 개념은 수필이다. 수필은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을 형식의 구애 없이 써내린 글을 말한다. 이러한 수필은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여기서 경수필은 '미셀러니', 중수필은 '에세이'라고 한다. 미셀러니라는 단어는 생소할 것이다. 다만, 대부분 미셀러니를 쓰고는 에세이라고 우기고, 심지어는 미셀러니를 에세이라고 칭하며 출판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단어가 띠는 대중성을 잘 고려하여 보다 익숙한 '에세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작가라는 양반들이 앞서서 오개념을 사용하고 또 퍼뜨린다면 결코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수필과 중수필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경수필(미셀러니)은 말 그대로 가볍게 써내린 글을 뜻한다. 논리를 담고 있는 글이라기보다 일종의 일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그런 글 말이다. 논리와 논증 따위의 내용보다 주관적인 감정과 감성의 영역이 강하다. 반면 중수필(에세이)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실을 다루고, 글쓴이가 문장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중수필의 경우는 '개인 일기'의 느낌보다 '관찰 일지'라던가 '논리적 사색'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출판계에서는 소설이나 시가 아닌 모든 문학에 '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팔아먹는다. 그래서 조금 유명해졌다 하면 에세이를 쓰고, 하다못해 만화영화 캐릭터가 표지에 그려진 책도 '감성 에세이' 대우를 받으며 보란듯이 에세이 코너에 진열되어 있다.

요즘 나오는 에세이는 에세이가 아니다. 물론 문학도 예술적인 영역이기에 에세이와 미셀러니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에세이'의 대부분은 '미셀러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통해 오개념을 바로잡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럼 어떤 에세이가 진짜 에세이인지, 내가 읽어 보았던 책 중 괜찮았던 책을 몇 권 추천하며 글을 줄인다.


최정희 「첫 애인」

내가 처음 사랑한 남자의 이름은 '삼택'이라 불렀다.

얼굴이 희고 매끈하게 생긴 조용한 성격의 아이였다. 그는 항상 지렁이와 뱀을 고아 먹었는데, 나는 그가 무슨 까닭으로 해서 그러한 것을 고아 먹는지 몰랐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나는 아직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의 참맛을 알고 있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