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경제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장카프페라는 숨겨진 요새다. 이 반도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딸려있다.
아무도 모르는 전 세계 최고의 부촌이 여기 있다.
이런 겁니다. '여기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맨 꼭대기, 대충 이즈음 어딘가에, 자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적당한 이야기가 나도는 겁니다. 영 삐걱대지만, 뭇 신화의 골격이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살이 붙습니다. 누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흘러가는 풍문 정도면 됩니다. 사실 인지 거짓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거짓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막간에는 그런 뻔뻔함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 위대한 경제적 자유의 신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탄생했습니다. 황당한 서사입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언뜻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여느 신화들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피라미드가 궁금해집니다. 특히 그 꼭대기에 한번 가보고 싶어집니다. 경제적 자유가 거기 있을까?
실제로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녀와 봤습니다. 대강 저 피라미드 가장자리 어디쯤까지요. 솔직히 그 이야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갈 일이 있어서 가봤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누굴 믿겠습니까. 저를 믿으세요. 그곳에 경제적 자유는 없었습니다.
진실로 이야기하자면, 그곳에는 자유 비슷한 것도 없었습니다. 경제와 자유라. 가끔 이 속 편한 허상을 설파하는 사람들을 지나쳐오긴 했습니다. 머리에 기름칠을 하고, 칠판과 카메라 앞에 선 멋쟁이들, 그들은 경제가 뭔지 몰랐고, 자유가 뭔지 몰랐습니다. 애당초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진리를 탐구하는 일입니다. 경제적 자유라는 것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하얀 보드에 작대기 몇 개 대충 그어 놓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분명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공상도 맛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자유 사람은 갈망합니다. 더 원합니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에 그렇습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사람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런 겁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완전해질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음에 도전할 겁니다.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완전해질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간에 도전할 겁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신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고 한다면요?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신에게 도전할 겁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아주 오랜 후에, 우리가 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완전해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가지려 할 것입 니다. 그렇게 사람은 영원히 완전함을 추구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위대하게도. 그게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이런 모양입니다. 불완전합니다. 비합리적이고 나약하고, 또 그렇게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정체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갈망하기에 자유인 것이고, 갈망은 사람의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답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길을 걷는다.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경제 때문에 그곳에 자유는 없습니다. 사람에 관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럼 경제적 어쩌고의 관점에서는 어떤가요. 자본주의 시대니까, 자본이 튼튼해지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않나요?
아니요, 같은 이유로 이 또한 논할 만한 이야기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더 원합니다. 영원히.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이를 잘 압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 식사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품질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품질에 대한 고민이 끝났을 때에는, 그 가치에 관하여 고민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 가치에 관한 고민이 끝났을 때에는, 이들을 아우르는 나의 가치에 관해서.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 모든 가치를 지탱하고 있는 내 기능과 존재에 관하여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얻은 것이 있다면, 지킬 것이 생깁니다. 때문에 우리는 갈망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저녁 반찬 걱정이 수백 직원의 생계 책임이 되는 것이 자본 증식입니다. 이러한 일에 어떤 종류의 자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 빌라에서 가장 사랑한 풍경. 이 시기에 누가 말하길, 옆집은 아르노 가문의 소유라고 했다.
아르노 가문, 가문... 가문이라!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 풍경을 함께 나누며 살아갔다. 그 사실이 부러웠다.
나도 내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적 자유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아무런 노력 없이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로 인해 모든 사회적 문제가 종결되는 상태'입니다. 자그마한 비아냥의 욕구도 멀리하고, 아주 정중히 말하건대, 살면서 이렇게 편리한 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저는 경제적 자유란 사이비 종교와 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악함에 관해 말하자면 사이비는 경제적 자유 앞에 초라합니다. 적어도 성공은 미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나오는 대로 지껄일 수가 있단 말인가요. 무혈, 불로, 자동, 유지, 풍요, 자유. 저 짧은 구절에 포함된 그 모든 낱말들은, 어떠한 순간에도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경제적 자유라는 것이 진지한 논제가 되지 못하는 데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넓고 큰 집에 지내며 마세라티를 모는 것으로 만사 쾌조하리란 생각은 그저 얄궂고 귀여울 뿐입니다. 밥값, 술값, 방값 걱정이 없는데 그곳에 왜 자유가 없냐는 식으로 으르렁대는 일은 어떠한 이론도, 철학도 아닙니다. 논증 가능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될 수 없을 뿐입니다. 다만 이를 우리 시대의 진리라 말하며, 이를 통해 세대의 방황을 담보 잡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대충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란 그 영유아적 상상도, 실패는 두렵지만 작은 성공은 얕보는 그 조숙한 간사함도, 적당한 망상으로 천국을 설파하는 그 어리석은 뻔뻔함도, 더 이상 귀엽지만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