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화는 꼭 필요할 때만 내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던 남자는 살면서 화낸 적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남자는 모난 구석이 없었다.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남자에게 어쩌면 남자의 이미지는 꾸며지고 계획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잘 베낀 가짜는 진짜와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남자의 이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 떠들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런 남자가 있다. 남자의 머리는 늘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 든 생각들조차 저마다의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남자는 깔끔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깔끔함'이기도 했지만, 남자를 볼 때면 늘 잘 꾸며지고 관리된 난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공적인 일을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깔끔했다. 뒤끝이 없었다. 자잘한 정이 없어서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끝난 인연에는 눈길조차 주는 일이 없었던 그의 인간관계는 늘 깨끗했다.


남자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래서 보다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숨길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 채. 본인과 타인의 이득을 함께 챙길 수 있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곤 했다. 물론 들키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치밀한' 남자가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남자의 전애인은 아직도 남자의 첫 연애 상대가 본인이라고 알고 있으며, 남자는 언젠가 만났던 애인에게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1년 동안이나 숨겼다. 그 사실도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알게 된 이야기지만. 남자는 본인만 알고 있는 비밀이 많았다. 남에게 말 못 할 비밀이라던가 치부를 가지고 살았다. 남자는 본인만 알고 있는 비밀을 스치는 인연들에게 하나씩 풀었다. 어차피 그들과 오래 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곳저곳 남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 모두 남자가 어떤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남자의 섹스는 그랬다. 남자의 섹스 패턴은 뻔했지만 확실했다. 애매한 것보다야 확실히 나았다. 섹스할 때는 늘 콘돔을 사용했고, 대실하는 일은잘 없었다. 모텔 일회용품은 뜯지도 않고,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있는 세면용품을 사용하곤 했다. 호텔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비치된 샴푸를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본인만의 세계가 확실했고, 그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남자의 사랑도 깔끔했다. 남자에게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큰 요소가 아니었다. 하면 하고 아니면 안 하는 딱 그 정도. 그래서 남자는 이별이 무섭지 않았다. 흔한 발라드 가사 하나 공감하지 못했다. 사랑 때문에 눈물짓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여유가 흘러넘치면 저리 시간과 감정을 허비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여자는 자신의 인생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노력'이라던가 '성실'과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저 그렇게 공부해서 그저 그런 지방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갔다. 웹툰 '복학왕'에나 나올 법한 학교가 진짜 존재하는 거였다니. 여자도 여느 새내기들처럼 연애와 캠퍼스 낭만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허물어질 것 같은 학교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쫙 깔린 원룸촌.

밤이면 빌라와 빌라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이런저런 잡음들.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러니까 누군가와 첫 섹스를 하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 학교와 그 공간에 머물러 살다 보면 평생 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여자는 처음으로 객관적인 본인 상태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사람 다짐은 대개 나흘을 채 못 간다. 여자의 첫 연애도, 첫 섹스도, 이별도,두 번째 연애도, 여러 섹스도, 대학생 신분으로 했던 마지막 연애까지그 원룸촌에서 열리고 닫혔다. 여자의 자취방 현관 비밀번호는 사랑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다. 여자가 처음 원룸촌을 지날 때 들었던 잡음에는 이제 여자의 신음과 울음소리도 함께 녹아 있다.


새내기라고 불리던 시절까지만 해도 잘 정돈되어 관리되던 방은 갈수록 난장판이 되었다. 여자의 싱글 침대 시트와 자취방 공기는 식을 일이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의 크기는 하염없이 커서 담아도 담아도 넘칠 줄을 몰랐다.

여자도 비밀이 많았다. 여자의 비밀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비밀을 담아둔 항아리의 밑이 빠져서일까.

어디서부터 샜을지 모르는 여자의 비밀은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저기로 줄줄 샜다. 여자는 소문이 무서웠다. 여자는 떠나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대학가를 떠나 본인을 아는 사람이 하나 없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만났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 아직 그들의 인연이 어떻게 닿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자의 직장 동료는 남자와 여자가 소개팅을 해서 만난 줄 알고 있고, 여자의 여동생은 남자가 헌팅해서 만난 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남자의 사랑은 기회주의적이었고 여자의 사랑은 불안 억제 수단 정도였다. 그래도 남자보다 여자의 사랑이 더 헌신적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많은 부분이 못마땅했다. 거슬리는 부분 몇 가지만 바꾸면 행복한 사랑을 할 수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잘 타이르고, 때로는 꾸짖으면 언젠가는 여자가 바뀌리라 생각했다. 남자는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안 바뀌면 헤어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여자도 남자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그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이전에 만났던 애인들과 함께한 장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복잡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졸업하자마자 찐득한 원룸촌을 나온 건데, 마치 낙인처럼 찍혀 여자에게 남아 있었다. 여자는 불안했다. 여자는 연기를 잘하지 못했다.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나는 성격이라,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숨기는 게 있으면 티가 났다. 그리고 눈치 빠른 남자는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남자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화를 냈다. 남자는 스스로 짓고 있는 표정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서 표정을 풀려고 했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표정이 더 망가질 뿐이었다. 여자는 땅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뚝··· 뚝··· 뚝··· 아니, 펑펑··· 남자가 화를 낸 이유까지도 둘만의 비밀. 사실 그 화는 '분노'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운 감정 표출이었다. 본인 역량의 한계에 대해 깨닫고 난 뒤에 드는 절망감이었을까. 본인이 알지 못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후에 든 회의감이었을까.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아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가슴이 시큰거렸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 이때까지 진행된 남자의 사랑은 깔끔했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남자의 사랑이 이번에는 잘 끊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사랑 때문에 처음으로 아픔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가'는 더 이상 남자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그냥 시작한 사랑이 왜 이렇게 아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마주해야 할 이별이 두려워서일까. 당장 여자를 보듬어 줄 사람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드는 공포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자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원룸촌에서의 초상이 떠올라서일까. 여자가 흘린 눈물에 사랑이라는 이유가 담겨 있을까. 여자는 이제 잘 모른다. 사랑은 둘째치고 여자에게는 이별보다 공백의 두려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