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사랑을 하나하나 꺼내 놓고 펼쳐 보면 많은 사랑에 회기가 묻어 있다. 특히나 20대 초반의 연애에 회기가 묻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회기에는 대학과 원룸촌, 값싼 술집과 보금자리가 즐비해 있었기에 자연스레 우리는 회기로 모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여럿의 사랑을 보았을 때, '연애' 자체가 회기에서 시작되어 회기가 우리 사랑의 '배경지'로 다가오는 경우도 몇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를 놓고 보면 처음부터 내 연애에 회기가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 회기에 다녀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업무 때문에 못 해도 달에 한두 번은 회기에 방문하곤 했었는데, 올해에는 그렇다 할 기회가 없어서 회기에 들르지 못했다. 반년도 더 지난 상태로 방문한 회기는 변함이 없었다. 회기는 여전히 내가 스물일 적에 머물러 있어서 세트장에 와 있는 듯한 어색함이 들기도 했다.


어떤 사랑은 뜬금없이 회기에서 시작되었다. 인스타그램으로만 흘겨보던 전애인의 대학 후배를 회기에서 우연히 마주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고, 그 여자와 두 번 더 만난 뒤 동해에서 연애한 적이 있다. 또, 이런 사랑도 있었다. 애인의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살면 좋겠어'라는 그 말에 나는 짐을 싸서 회기로 갔다. 기존에 살던 집 계약이 채 끝나지 않아 위약금까지 물고서는 말이다. 애인은 우리가 동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우리는 회기역 2번 출구로 나와 걷다가 코너를 꺾고 들어가면 보이는 애인의 구축 주택에서 함께 지냈다. 애인의 말 한마디에 울고 한 마디에 웃었던 때였다. 나를 향한 애인의 관심 정도가 곧 그날 하루 내 기분을 결정했다. 내 모든 것을 주었던 애인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잤다. 내가 애인의 집에서 강아지마냥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애인은 다른 남자의 집에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왔다. 나는 양손 가득 내 몫의 짐을 챙기고 나와 본래 살던 동네로 갔다. 본래 살던 동네에 내가 살던 집에는 세입자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고,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기분에 망연자실했다.


어쩌다 보니 만나던 애인이 회기로 이사를 가서 우리 사랑에 회기가 등장한 경우도 있고, 애인과 다투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장소가 회기였던 경우도 있다.

당시 나는 입대도 하기 전이었던 스무 살 언저리 풋내기였기에 생각이 많았다.

지금보다 생각이 더 많았다. 그 생각은 고민에 더 가까웠다. 그 나이대 하는 고민은 대개 사랑이다. 스물이나 스물하나, 스물둘이라고 하면 나름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할 나이지만, 사실 대단찮은 고민을 할 수가 없는 나이다. '사랑' 외의 것들 때문에 고민이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저 나이대에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허탈함'을 느끼는 이유는 대개 본인의 사랑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회기에서 했던 이별을 하나 꺼내 볼까. 여자와 연애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함께하는 미래와 우리가 이루는 '가정'까지 떠올리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온전히 여자를 사랑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일전에도 했던 말을 계속 내게 반복했다. 그 이야기를 마치 내게는 처음 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와 한 달 동거하다 바람이 난 애인과의 연애 이후 나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녀 또한 누군가와 나를 헷갈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 때문에, 그리고 내게 해 준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처음 해 주는 척'하며 들려주었으리라는 확신 때문에 괴로워졌다. 여자는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이나 자주 가는 장소, 그녀가 쓴 글을 보면 전애인과의 연애를 암시하는 듯한 것들이 많았다. 확실한 법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확신이 없으니 답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고, 답답한 부분이 있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내뱉으면 내가 '찌질한 사람' 취급을 당할까 봐,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여자와는 회기의 무슨 파전집에서 이별했다. 낡은 가게 내벽에 연인들끼리 저마다 영원을 기약하며 쓴 낙서가 범벅되어 있던 어느 허름한 파전집에서 나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여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간만에 회기에 다녀오니 몽롱하다. 꿈에서만 보던 장소에 다녀온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이니 말이다. 한 편의 꿈과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진 내 환상의 동산 회기는 여전히 회기였다. 언젠가 내가 사랑을 피울 날이 오더라도 이제 회기는 글쎄다. 두고 온 사랑은 회기에 묻고, 이제는 그곳에서 있었던 사랑을 글로 쓰는 일은 관두어야지. 생각이 많아지고 떠오르는 기억이 많아지는데, 벌써 10년도 훌쩍 지난 일이라 생생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내 기억 속의 나'와'실제 당시의 나'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말이다. 기억을 본인이 유리한 대로 왜곡하지 않는가.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오도, 아, 피우지 못한 사랑도, 시들어 버린 사랑도 이제는 작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