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유은 사이에 있었던 한바탕 소동을 들은 친구 하나는 오랜 침묵 끝에'둘 다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혀를 찼고, 다른 친구 하나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냐'고 말했다. 원하는 대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답이 정해 두고 물어본 것도 아니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질타 섞인 답변을 받고 나니 괜한 심술이 났고, 내 푸념을 들어 줄 사람 어디 없나 싶어 연락처를 한참 뒤지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그 친구와의 인연도 질기다. 훈련소부터 해서 후반기 학교, 희한하게도 자대까지 같은 곳으로 배정되어 군 생활 전부를 함께하며 동고동락했던 탓에 정은 정대로 붙이고, 그 친구 앞에서는 속마음도 숨김 하나 없이 털어놓곤 했다. 친구는 군대서부터 몇 번이나 피우고 진 나의 사랑을 곁에서 지켜봤다. 어쩌면 동성 중에서는 가장 유은과 닮아 있는 놈이었던 탓에, 나는 청춘사업에 고민이 생길 때마다 친구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친구는 입에 담배를 물고서는 웃으며 말했다.
"야, 너는 그때 그 블로그로 알게 되었다는 사람 왜 그 사람 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유은 말하는 건가? ""그래, 유은. 너는 그 사람이랑 한 번은 연애해야 한다니까? 유은을 두고 자꾸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으려니 잘 풀릴 리가. "당시 나는 유은과 연애해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 내가 군복무하고 있을 당시 간간이 유은 블로그에 올라오는 포스팅을 훔쳐볼 때면, 연애하고 있는 유은 모습이 보였다. 유은은 연애 중인데 어떻게 나와 연애하는 경우가 벌어지겠느냐고 친구에게 따지듯 말하면, 친구는 다시 입에 담배를 물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 유은이 만나는 애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말야. 사람에게는 인연이라는 게 있어. 그냥 인연도 아니고 잘 맞는 인연 말야. 네가 지금은 방황 중이지만, 유은인지 뭔지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부터 달라진다니까. 너 있잖아, 지금 유은이 연애 중이랬지? 만약 유은이 이별한다고 가정해 봐. 그런 다음 유은이 네게 연락해서 연애하자고 한다면 너는 거절할 수 있을까? 못 하겠지? 인마, 거 봐. 그게 인연이고 사랑인 거라니까.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 말야. 나는 장담한다. 너는 언젠가 유은을 실제로 만나 연애할 거야. 확실해. 그리고 헤어지겠지. 그때 네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정신적인 도약이나 성숙의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그래. 네가 내게 여태껏 해 준 유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내 생각은 그래. 세상살이가 참 웃긴 게 뭔지 아니? 썩 반갑지 않은 사람과 엮이게 되었을 때는 '세상 참 좁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지만, 지독하게 엮이고 싶던 사람과 엮이게 되었을 때는 '인연'이라는 단어까지 가져와서 유난을 떤다니까. 네가 유은을 처음 만나고 내뱉을 말은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해. 그래, 내 생각은 그래. 내가 네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는 법이지만.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친구가 당시에는 웃겼고, 그러면서도 친구가 했던 말이 현실이 되면 내가 언젠가는 유은과 실제로 만나 연애하게 된다는 말이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기도 했던 나의 군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웃어넘기기만 하던 이야기가 결국에는 현실이 되었고, 유은과의 연애를 막 시작했을 적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그 친구였다. '네 말마따나 결국 나는 유은과 연애를 하게 되었구나' 하는 데에서 오는 반가운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니라, 친구가 언젠가 했던 그 말이 떠올라서 두려웠다. '너는 유은과 연애하고 헤어진 다음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정신적인 도약이나 성숙의 과정을 겪을 것'이라는 그 말이 떠올라서. 괜히 불안해졌다. 만약 내가 유은과 연애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친구의 말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군 제대 후 이런저런 풍파를 맞으며 일종의 정신적 성숙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정신적 성숙이 아니었다는 것인지, 유은 앞에서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나의 미숙한 모습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괜히 나의 행동을 검열하게 되었다. 유은 앞에서는 유독 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했고, 그 탓에 괜히 더 위축되었다. 당시 내 나이도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 것은 맞지만, 예비군도 끝난 지금의 내 나이에서 보는 '갓 전역했을 당시의 내 모습'은 어리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나의 군시절을 회억하고 그 억겁의 시간을 함께 보내었던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즐겁고 반가워야 마땅한 일인데, 이 순간에 지난 군시절이 떠오르는 것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오죽 현재에 불만족스러우면 10년이 다 되어 가는 과거가 떠오르나 싶어서. 오랜 추억이 떠오르며 이야기가 샜지만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덜어낸다는 것은 곧 내 과거에 묻은 유은을 덜어낸다는 것과도 같아서. 그 어떤 순간도 부정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쓸 때마다 유은이 언제나 내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고, 또 놀란다.
아무튼 나는 알동기 친구에게 간만에 연락하여 지난 5월부터 나와 유은 사이에 있던 이야기를 전부 가감 없이 늘어놓았다. 친구는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주었다. 중간중간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말을 끊지는 않았다. 친구가 입을 열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 도중에 다른 이야기가 오가다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오롯이 전달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기 때문에. 나는 조언해 줄 사람보다 이야기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내 나의 한바탕 조잘거림이 끝나고, 친구는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이렇게 많은데 여태껏 전화 안 하고 어떻게 배겼냐? 남들이 뭐라고 해도 네 인생을 살어. 마음 가는대로 살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그 선택이 옳다고 생각할 거야. 옛날에도 넌 애늙은이 같았는데... 그때보다 더 어른스러워졌구나 너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른이 맞지. 빠르다 참. "
그 전화를 끝맺고 나는 유은에게 다시 연락했다. 이후로 우리는 따로 몇 번을 더 만났지만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다 할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시콜콜한 사적인 대화 따위나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모든 대화를 글로 남기기가 싫었다. 나는 내 인생을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늘 그랬듯 내 앞에 놓인 사랑에 과한 의미부여를 하며 소설을 쓰고 싶지도 않다.
언제나 나는 쓰는 입장이라 오히려 유은 앞에 서면 감정을 숨기게 된다. 나는 글을 통해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유은은 그런 나의 모든 글을 보는 입장이니까. 나 혼자만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문학이나 소설에서는 '예술'로 포장 가능한 이런저런 행동들 또한 현실에서는 포장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행동을 조심했다. 내 삶은 문학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니까. 나는 유은 앞에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행동을 더 과장되게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유은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기도 했다.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나는 네게 '여행'을 제안했고, 너는 그런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했다. 이날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풀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아주 간만에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굴 마주하고 떠드는 일은 늘 즐거운 것이 사실이니까. 소주에 맥주에 이런저런 흥까지 섞어 마시고, 숙소로 들어가 씻고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또 한참을 떠들다 보니 시계는 네 시 반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취침'이 곧 영원한 이별을 하러 가는 길도 아닌데, 나는 그 밤을 보내기가 아쉬워 괜히 시답잖은 말이라도 네게 붙이며 시간을 끌었다. 밤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워 서운할 지경이었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밤이 지나면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면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내가 웃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언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너는 나와 닮아 있으니까. 나는 네게 숨기는 것이 많다. 그것은 너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비추어지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들이다. 그래서 내뱉지 못하는 말도 많다. 나는 우리의 8년이라는 공백이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시간이었으리.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잠들었다. 나는 늘 너보다 먼저 눈을 떴다.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나의 뒤척임으로 인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네가 깰까 봐 조심스레 움직였다.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네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번에도 다른 목적은 없었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고는 네 옆에 다시 누웠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는 네 옆에 누운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리를 잡았다. 코앞에 네 얼굴이 있었다. 정말 코앞 거리에 네 얼굴이 있었다. 우리가 한 달 전쯤 잠 '만' 잤을 당시 우리 사이에 두었던 거리는 '성인 남자 주먹 대여섯 개' 정도였지만, 이번에 둔 우리 사이 거리는 '성인 남자 손바닥 하나' 정도가 전부였다. 너의 숨소리가 생생히 들렸고, 너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을 네 머리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쓰다듬었다.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이 떨렸다. 나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다는 내 맹세가 우스워질 정도로 말이다. 그때, 자는 줄만 알았던 유은이 입을 열었다.
"숨을 왜 이렇게 거칠게 쉬니. 일찍 깼네? 좀 더 자자. "그러고는 되레 유은이 나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잠꼬대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 손길은 여느 연인 사이에 오가는 손길이라기보다는 마치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손길에 가까웠다. 그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8년 만에 닿는 너의 손길 아니었던가. 나는 그런 손길조차 마다할 수가 없었다. 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나는 네가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너의 얼굴에는 참 많은 것들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너와의 이별 이후 정신적인 성숙이나 도약을 했던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 일주일 전, 너는 내년 초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외국 생활 경험이 있고, 8년 전부터 '언젠가 한국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너였기에 나는 '이제는 회피할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쓸데없이 서운해지고 속상해졌다. 연인 관계도 아닌데 그런 미련한 감정을 느끼는 나 스스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너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왜 나는 떠난다는 네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인지, 과거 우리 연애의 이별 사유 또한 '너의 유학' 때문이었는데, 그때의 장면이 겹쳐 보이는 듯하여 모든 것이 불만스러워졌다. 나는 감정을 숨긴 채 덤덤하게 말했다.
"9개월도 안 남았네? ""아예 눌러살 건 아니고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녀오려구 해""다행이야""뭐가 다행인데? "그러게 뭐가 다행이었을까. 그저 네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는 감정을 느낄 정도로 너는 네게 정신적 위안이 되는 존재라는 말일까.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나는 과하다 못해 건방진 오지랖을 네게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다시 네 앞에서 어리광 부리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이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지만, 그런 감정을 내가 느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었다.
다시 돌아와 그 다섯 평 남짓한 모텔방으로. 나는 네게 입을 맞출까 말까 수백 번 고민했다. 고민이 계속될수록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고민에 빠져 있자니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가 의식되어 숨을 고르게 되고, 숨을 고르고 있자니 머리가 터질 듯 뛰고, 내 손은 네 뺨을 쓸어내리고. 분명히 너도 잠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잠에 빠진 상태로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무엇이 옳은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조차도 내 행동에 확신이 서질 않는데, 이러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이 네게 드러난다면, 자칫 네게 전이되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불안은 절반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가 되니까. 끝내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잠든 너의 손을 꼬옥 잡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너는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 주었다. 나 또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했다. 어느 편지에 적혀 있던 말마따나 과거도 미래도 지금은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글을 쓰고 나니 또 나만 헐벗은 기분이 든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제아무리 네가 나와 닮았다고 한들, 내 심경도 제대로 서술하지 못해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이 글을 붙잡고 있는데 어찌 내가 네 속마음까지 알 수 있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