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군대 보낸 애인과도 하루가 멀다고 전화가 가능한 요즘과는 달리. 내가 복무할 때까지만 해도 휴대전화 사용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허용된 전자기기라고 하면 내무반 안에 있는 작은 티브이 하나와, 흔히 '싸지방'이라고 부르는 '사이버지식정보방', 즉, 컴퓨터실에 있는 컴퓨터 몇 대가 전부였는데, 당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전자기기가 제한적이었던 만큼 싸지방에 있는 컴퓨터는 늘 고참들의 몫이었다. 사회와 단절되다시피 한 채로 살아가다 보니 정말 단절된 채로, '나'라는 사람과 '군(軍)'이라는 집단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군에 간 남자들이 모두 한 번쯤은 한다는 고민을 나도 하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어느 순간부터 '대체 얼마나 더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의문을 가지며 변하지 않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던 나의 제대를 막연하게 그렸던 것 같다. 군대라는 곳에서는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지만, 또, 희한하게도 며칠에 한 번꼴로는 그 무료함을 타파해 줄 이벤트가 발생하곤 하는데, 군에서 스친 나의 두 번째 여인과의 인연도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이어지고야 만 것이다. 때는 내가 상병을 달고 약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 고달팠던 막내 시절을 지나, 치여 산다는 것의 서러움을 알게 해 준 일병 시기를 지나, 비로소 상병이라는 계급장이 나의 가슴팍에 들어와 진정한 나의 것이 될 때, 그 별거 아닌 약장 하나인데, 나는 무엇을 그리도 좋아했었는지. 상병을 달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고, 전역하기 위해서는 수개월을 더 해야 했는데, 당시에는 어깨에 힘이 잔뜩 실리곤 했다.
무엇보다 그 정도 짬이 차면 '싸지방' 정도는 눈치 안 보고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스타그램이 SNS 시장을 독점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오히려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더 많이 사용했다. 사실 군대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들, 대단한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게임은 물론 불가능하고, 게임을 제외하면 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으나, 사회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이 닿아 그들이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기라도 한다면 기분이 참 좋아지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나는 페이스북 창을 띄워 두고, 페이스북 메신저로 친구들의 안부나 물어대고 있었다. 그때, 모르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나 기억 안 나? 나 윤지인데, 장윤지. 진짜 오랜만인데 잘 지냈어?"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장윤지?
윤지?
장윤지... 장윤지.... 한참 동안이나 그 이름을 떠올려 봤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분명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이름만 봐서는 흔한 이름이라 낯이 익다고 볼 수가 없지만, 성(姓)까지 붙은 그 이름은 분명히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상대방과의 친분이 헷갈리는 경우에는 얼굴을 한번 보고 나면 조각나 있던 기억이 붙으며 무언가 떠오르곤 하는데, 참 이상하게도 나는 윤지의 얼굴 사진을 확인했음에도 그 어떠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실존하는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가 나의 이름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나의 학교와 전공을 들먹이며 하던 공부는 잘 돼 가느냐는 말을 덧붙였기에, 나는 이름도 익숙한 윤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누구세요?
우리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이인가요?"
사실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괜히 윤지에게 무안을 주는 것 같아서, 윤지가 누구인지, 우리가 실제로 만난 사이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것보다는, 윤지와 시시콜콜한 연락이라도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지와 나의 인연이 어찌 닿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알아가도 될 듯하여 나는 이렇게 답장했다. "윤지야 정말 오랜만이다. 그래, 너도 잘 지낸 거야?"
"나는 계속 학교 다니고 있어. 너는 군대에 갔다며? 소식 들었어. 어때? 지낼 만해? 휴가는 언제야? 밥이나 한번 먹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윤지는 나의 예상보다 더 호의적이었다. 나에게 이렇게 잘해 줄 만한 이성이 없는데, 그동안 지난 연인들로부터 돌려받은 상처와 아픔이 너무나 커서 자기방어 본능이 튀어나와 그따위 의심이 들었던 것 아닐까.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 온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내무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얼굴은 예쁘냐, 몇 살이냐, 뭐 때문에 연락이온 거냐, 질문이 쏟아졌고, 꽤나 반반하고 나이도 나와 동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부럽다는 말만 남발하던 동기들과 선후임들의 얼굴이 선하게 그려진다. 연락하고 지낼 이성이 생겼다는 말은 곧 휴가에 나갔을 때 약속 하나 더 잡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남정네들과 홀애비 냄새 풍기는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서 두 달도 더 남은 다음 휴가 때 윤지를 만날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았다. 나의 상상 속에서 윤지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나의 애인이 되었다가, 나의 외사랑 상대가 되었다가, 가끔은 윤지와 연애하는 상상을 하며 그렇고 그런 상상까지 하기도 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윤지를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우리가 일전에 만난 적이 있다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면 우리의 관계가 자연스레 끊기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윤지로부터 연락 닿은 지 2주가 다 되도록 우리 인연의 시발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이 닿은 지 2주나 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사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하기도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그것이 윤지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간 연락을 나누며 성격을 파악한 결과 그러한 일로 역정을 내거나 토라질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실망하여 연락이라도 끊는다면, 다음 휴가로 기약한 우리의 약속을 파투 낸다면, 아, 끔찍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반대로 윤지는 신기하리만큼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일절 기억이 안 나지만, 윤지의 말에 따르면 몇 해 전 우리가 연락을 나눌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행동 습관이나 말버릇, 심지어는 흘러가는 식으로 말한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뭐, 윤지는 서울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이라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으니 기억력이라든가 머리 자체가 남들에 비하면 뛰어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뇌가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수는 없는 법. 윤지는 내게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하여튼 참 신기했다. 윤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윤지와 연락이 닿은 지는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넘게 지났고, 나의 휴가까지는 보름 정도 남았던 그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일과를 끝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싸지방에 갔다. 지금부터 전개될 이야기를 하기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 나와 윤지는 연락이 닿고 그날이 되기까지 얼굴은 한번 보지 못했으나 연인들끼리 주고받을 법한 대화를 서슴없이 주고받기도 했다. 유은과의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아무래도 군대 안에 있다는 그러한 특수성에서, 낯선 이성을 만나니 피어오르는 욕망은 내 마음대로 주체할 수가 없었나 보다. 게다가 윤지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일전에도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했으니, 나는 합리화하며 윤지에 대한 호감을 키웠다. 그럴 때면 나는 윤지와 더욱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 연인들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보고 싶다' 정도의 말까지는 손발 오므리며 할 정도였고, 윤지 또한 내게 그러한 대답으로 맞받아치며, 얼른 휴가 나오라는 말까지 하곤 했으니 말이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2) 문제는 그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여느 때처럼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는데... '장윤지 님과 한태민 님이 자유로운 연애 중'. 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모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였구나. 허탈함이 드는 한편 그 남자의 연애가 그리 순탄치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 나는 정말 진심이었던, 나에게는 유일했던 그 2개월 조금 안 되는 기간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다. 그날은 자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흘렀다.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남자는 군대에서 한 번 운다는데, 나는 그 기회를 그날 새벽에 사용하고야 만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