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사실 군대라는 곳이 그렇다. 군대에서도 애인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볼 때면 부러움의 감정이 들지만, 동기든 선후임이든 애인과 다투고 울적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오히려 연애 안 하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있을 때면 연애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지만, 군대에서는 아무리 짬이 찬다고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단계 언저리까지 갔다가 관계가 파투 난 적이 있을 때도, 나는 일전에 언급한 것처럼 심심한 슬픔에 잠겼으니 괜히 무리해서 애인을 만들었다가 갖가지 사소한 일로 스트레스받을 바에야 제대를 하고 여유가 생기면 연애를 하자는 다짐을 하고 살았다. 군대라는 곳이 사회에 비해서는 놀거리도 적고, 얻을 수 있는 자극의 정도도 덜하지만, 그렇기에 잠들기 전 내무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라든가 초소 근무 중 선후임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욱 값지게 다가왔다. 사회에 있을 때라면 웃지도 않았을 시시콜콜한 농담에도 모두가 웃었고,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던 티브이는 우리의 전부였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보다 군대가 더 편해지기 시작했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도 그곳에 익숙해져서, 그저 그렇게 짬을 먹어가는 병장이 되어 있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그렇다고 해서 외박이나 휴가가 기다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병장이 되어서도 외박은 나를 참 설레게 만들었는데, 이제야 고백하건대, 아마 대부분의 현역병들이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나는 위수지역인 의정부를 벗어나 늘 서울에서 놀곤 했다. 첫 외박 때 위수지역을 벗어나자고 하는 선임에게 '그래도 됩니까?'라고 물었다가 딱밤을 한 대 얻어맞고는 '안 걸리면 누가 알아 새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니. 군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안 걸리면 그만이었고, 지키고 사는 놈들보다 어기는 놈들이 더 많았다.
어떤 가라든 걸릴 일은 희박했고, 어쩌다
걸리게 된다면 마지막에 걸리는 놈이 여태까지의 책임을 다 지곤 했으니, 참.
희한한 곳이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아무튼 그날도 외박을 나가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서 나왔다. 상병을 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휴가든 외출이든 사회 나가기 전날만 되면 군화를 닦고, 옷을 다림질하곤 했는데, 병장쯤 되니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뭐, 동기와 후임 몇 명 데리고 나와 밥을 사 먹이고, 당구도 한 게임 치고, 서울 번화가에서 그렇다 할 골목은 없지만 최대한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피우는데, 키가 좀 작고 앳돼 보이는, 쌍꺼풀이 없었지만 오히려 없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이던 한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혼란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던 와중,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혹시 휴가 나오신 거예요? 여자친구 없으시면 번호라도 주실 수 있어요?" "네? 저 군인인데..." "네!" "저 아직 제대하려면 3개월도 더 남았어요." "그래서 번호 안 주실 거예요?"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당돌하게 말하는 그녀 눈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임이 느껴졌고, 사실 그날 나는 태어나 누군가 내게 연락처를 물어본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내게 연락처를 물어보던 그녀의 외모가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준수했던 편이라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연락처를 넘겨준 뒤, 짧은 인사 후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휴대폰을 몇 초에 한 번꼴로 확인하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나이도, 이름도, 얼굴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 여자의 번호를 받는 건데, 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투정을 속으로 부렸다. 그녀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의 여운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고, 그날 모텔방에서 부대 사람들과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그녀의 얼굴까지 희미해지면서 그녀는 잠깐의 인연으로 스쳐 지나가는가 보다 싶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숙취로 엉망인 속을 달래기 위해 해장을 하고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미안해요. 연락이 늦었죠. 어제는 너무 바빠서요. 실은 서울로 이사 온 지 나흘밖에 안 되어서 정신이 없네요. 뭐 하고 있어요? 외박 나왔다더니 이제 복귀 중인가?" 연락은 갑작스러웠고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왜 어제 연락을 주지 않았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그녀는 먼저 변명부터 댔고, '외박 나왔다더니 이제 복귀 중인가?'라는 말에서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녀가 나를 어린 취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어제와 같은 수법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가 보일 때마다 접근했던 것이라면, 나는 그깟 장난에 놀아날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고단수이신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꼬신 거예요?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그녀는 키읔을 여남은 개 남짓 보내며 나이는 스물셋이고 이런 식으로 번호를 묻는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고 말했지만, 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우리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잠시 잠깐 얼굴 한 번 봤다고 해서 다음 휴가까지 또 메시지나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연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도 저것도 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나의 신분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3) 연락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계속 연락해도 내가 마음을 주지만 않는다면 혹시 그녀가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거나, 여러 남자와 연락을 나누며 본인의 인기를 실감하는 수단으로 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실망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그녀와 연락을 계속하기로 했다.
내가 처음 오해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나에게 진심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성을 쏟아 주었고, 말년 병장 얼굴 보겠다고 면회를 하겠다고 부대까지 왔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내가 연락을 보내면 고생이 많았다며 걱정해 주고, 피곤하지는 않은지 물어봐 줬다. 전역하는 그날에도 부대 앞까지 찾아와 주며 고생했다고, 나는 그날 살면서 처음 꽃다발을 받아 봤다. 아,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따로 빼서 풀어 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