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남자가 인생에 대해 논하는 데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군대 이야기다. 하지만, 군대 이야기 자체가 일부 남성 독자들의 공감만 불러일으키고,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우리가 군에서 보낸 시간만큼이나 지루한 감정을 글 읽을 때 느낄 것만 같아서, 여태까지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군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일이 없을 듯한데, 사람 일이 언제나 그렇듯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혹시라도 먼 미래에, 나의 필명만 들어가도 글이 팔리는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군 시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미처 하지 못하고 잘 보관해 둔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남자라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는 국방의 의무를 나도 피할 수는 없었다. 혈기 왕성하고 무궁무진한 우리를 수용소 같은 공간에다 잡아넣고 1년 9개월(현재는 육군 기준 복무일이 1년 하고도 6개월, 총 18개월이지만, 내가 복무할 때까지만 해도 21개월을 채워야만 했다.)을 수용한다는 사실은 인제 와서 돌아봐도 참 야만적이고 암울하지 않았는가 싶다. 꽃다운 청춘이라 불리는 그 나이에 우리들은 내부반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지냈다. 공식적인 호칭은 생활관으로 바뀐 지가 한참이었는데 말이다. 좆같았다. 환경은 참 열악했고, 사회와 비교하면 우리가 군에서 받는 대우는 '인권 침해' 수준이었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시간이 흐르며 몸이 편해지고, 나름 재밌는 추억을 만들곤 했다. 아니, 군에서 만든 추억의 개수는 너무나도 많아서 늘어놓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이지만, 그 많고도 많은 이야기 중에서 나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한다. 연애할 사람들은 군대에서도 어떻게든 하고, 연애 못 하는 사람들은 '군필'이라는 딱지를 달고도 연애 못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운이 좋게도 전자에 속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이 글에 등장할 여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지만, 본래 이름을 살짝씩 바꾸는 식으로 사용하였고, 그 첫 번째 주인공이 될 사람은 '주은'이다. 다들 입대하기 전부터 만나던 애인이 하나씩은 있듯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은과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함께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은 '군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입대 후에는 얼굴을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점이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오래토록 기억할 만큼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말이다. 아예 기약이 없는 약속은 아니지만, 2년 가까이나 되는 긴 시간을 나라에 헌납하기 전의 기분이란, 나 또한 '해야 할 숙제를 하러 간다'고 되뇌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 마음이 편치는 못했으리라.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외롭다는 말이 있듯, 사랑하는 애인을 군대에 보내는 주은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입대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불편해져만 갔다. 나보다 일찍이 입대했던 친구들과 동기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며, 아, 이 친구들도 아직 제대를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어찌 펼쳐질지도 모르는 막연한 나의 군생활에 대한 공포감, 불확실한 미래,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입대하기 전까지 주은과 반년 조금 안 되게 연애한 것이었으니, 나의 제대는 그때까지 우리가 만난 만큼 네 번 정도 더 만나야 오는 것이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우리 사랑의 크기가 작아서 드는 막연한 감정은 아니었으랴. 잘만 연애하다 입대하니 헤어졌다는 소문이 주변에서 자꾸만 들려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일말상초가 진짜인가요?' 따위를 검색해 봤다. 분명 내 사랑은 그때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애써 회피하려고 했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입대를 일주일 남긴 날 우리는 여행을 갔다. 경주에 가서 뭐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숙소로 돌아가 이른 저녁부터 술을 마셨다. 나흘이나 되는 시간을 기약한 여행이었던 탓에 여유가 있다 못해 넘쳐흘렀고, 우리는 술을 마시며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술을 핑계로 취기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을 꺼내려고 했던 것인지, 약속이라도 한 듯 술에 취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왜인지 모르게 서둘러 술을 마시는 주은을 보며 나는 안주나 주워 먹었다.
무슨 안주를 그렇게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정도로 술이 고프지 않았다. 도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도피할 수가 없었다. 취기를 빌려서라도 해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다. 입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곧 내 눈앞에 펼쳐질 까마득한 2년이라는 어둠에 대하여. 그때 주은이 한참 동안의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래도록 유지되어 불편하던 정적을 깬 말이었기에 웬만해서는 호응해 주려고 했지만, 차마 내가 해 줄 말이 없어서 나는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잘 기다릴 수 있겠지?" "......"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침묵했다. 그때는 그녀도 함께 침묵했다.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입대가 처음이고 애인에게 고무신 신기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떠나는 입장이었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외로울 것이라고 앞서 언급했지만, 그때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진정시켜 주어도 모자랄망정,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기 바빴다. 어찌 됐든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 21개월 동안 젊음을 바쳐야 하는데, 그런 나를 보고 '잘 기다릴 수 있겠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대체 어떠한 답을 해 주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다시금 이어진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다. 나의 불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군대 있을 때 만났던 여자들 (1) "아직 입대도 안 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긴데.... 시간 금방 지나간다더라고. 입대라는 문제로 인해서 우리 사랑이 무너질 만큼 우린 가벼운 사랑이 아니잖아." 주은은 원하는 대답이라도 들은 듯 감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 품에 안겨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그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영원할 것만 같던 우리 사랑도 끝이 나는 날이 왔으니. 훈련소에서 받은 편지. 그녀는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며 내게 이별을 고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이 미지근하게 저물었던 군에서의 첫 연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