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자정이 훌쩍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대여섯 시쯤이었으니 우리는 일곱 시간이 넘도록, 입에 침이 마르고 닳아 입안이 텁텁해지도록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바뀌었다. 두 시간에 한 번꼴로 장소를 옮겼다. 대화에 너무 집중했던 나머지 우리가 이동하며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당신과 내가 먹은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가만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대 미술팀이 올라와 장소 배경을 바꾸어 주는 것 같았다. 취하지 않았다. 취하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맨정신으로 당신을 탐구하고 싶었다. 처음은 당신의 미소에 홀린 것이라면, 이제는 당신의 눈웃음이었다. 이렇게 미적으로 완벽한 여자가 내 삶에 있었던가. 그때 든 감정을 호감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건 알겠어요.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들어가 보아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금요일에 또 봐요.
어떻게 저에 대한 신비로움이 좀 풀리셨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만날 때는 제 이야기를 좀 해 드릴게요.
나는 그날 당신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도 해소하지 못했다. 대화는 많이 했지만, 가만히 회고해 보니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토로와 당신의 경청이 었던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숨기는 것이 많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당신의 입을 열게 만들 만한 '강렬한 키워드'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신이 남기고 간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당신과의 첫 만남이 그만큼 인상 깊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날은 내 삶에서 몇 안 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간 날'이었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다음 만남이 기약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제 나는 당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그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목요일. 당신과의 만남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 회기에서 나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내 상상이 그려낸 당신의 모습까지 당신에게 말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에 대하여 건진 정보가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더 부담되었다.
이번 만남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금요일. 당신과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든 감정은 설렘보다 긴장감이었다. 마치 면접을 앞둔 취준생의 기분. 첫 만남과 비슷하거나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어야 당신을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사랑은 가장 나답게 해야 변하지 않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겠지만, 당시에는 당신과의 사랑은 꿈에 불과했으니까. 나를 포장해서라도 당신의 환심을 사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칫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 부담감으로 작용되었다. 우리는 왕십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왜 왕십리였는지는 모르겠다. 당신은 일러도 너무 이른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간 나보다 10분이나 먼저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무표정으로, 하지만 화나 보이지는 않는 그 묘한 무표정으로 약속 장소에 일찍이 와 기다리고 있는 당신을 멀리서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구경했다. 당신은 휴대폰도 보지 않고, 일관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당신과 열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당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당신이 웃었다. 아, 그 웃음에, 시작이 좋다는 생각에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공식적인' 첫 만남부터 고상하게 와인에 치즈나 뜯고 싶지는 않다며 나를 알탕집으로 데려갔다. 닦아도 안 지워지는 찐득한 무언가가 테이블을 덮고 있던 그 알탕집에서 우리는, 아니 나는 당신에게서 오래 만난 연인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언제 부담감을 느꼈냐는 듯 편안했다. 시답잖은 안부나 주고받으며 서로 간이나 재다가 당신이 입을 열었다.
아! 나는 며칠 동안이나 당신을 당황시킬 첫 마디를 고민했는데,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담백하게 내뱉은 그 말은 나를 당황시키는 데에 충분했다.
아마 모르시겠지만 제가 사실 조금 아파요. 그래서 사람도 잘 안 만나고 그래요. 기분이 오락가락이라 피해 주기 싫어서. 어느 날은 콱 죽으려고 약을 먹었거든요. 사람 쉽게 안 죽더라구요. 죽으려고 하다 보니 살고 싶어졌어요. 지금은 살고 싶어서 살아요. 저에 대해 더 알아가려면 이것 먼저 말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말해요.
아, 맞다. 당신은 '어딘가 아팠다가 나은'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아팠다는 사실을 진작 전해 들었지만, 그동안 당신에게 매료되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아픔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레짐작하였을 때, 당신의 아픔은 절대 신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부분임이 분명했다. 일종의 감 같은 것이었는데, 사람을 보는 데에 있어서 내 감은 꽤 높은 적중률을 보였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뭐 어때요.
그럼 요즘은 뭐 하고 지내요?
일단 그렇게 말했다. 최선이었다. 그리고 담담해 보였을지 모르는 내 모습과 달리, 내 속에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 일단 평생 대해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사람인지라 나의 데이터베이스에 어긋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엇을 하고 지내냐는 물음에 당신은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을 얘기했다. 이때 당신이 내뱉은 말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 었기에. 그러나 두 가지 단어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사랑과 동해.
무슨 용기였 는지 모르겠다. 술기운을 빌린 것일까.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동해 가요. 동해에서 사랑이 뜰 수도 있잖아요. 안 뜨면 그만인 거고, 뜨면 거기서 한 며칠 지내다 옵시다. 어때요?
성북구글싸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