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말씀하셨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 말라고. 작은 것들은 하도 많아서 네가 사랑한 그 많은 것들이 언젠간 모두 널 울리게 할 테니까. 나는 나쁜 아이였나 보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나는 빨간 꼬리가 예쁜 플라밍고 구피를 사랑했고, 비 오는 날 무작정 날 따라왔던 하얀 강아지를 사랑했고, 분홍색 끈이 예뻤던 내 여름 샌들을 사랑했으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갈색 긴 머리 인형을 사랑했었고, 내 머리를 쓱쓱 문질러대던 아빠의 커다란 손을 사랑했었다. 그래서 구피가 죽었을 때, 강아지를 잃어버렸을 때, 샌들이 낡아 버려야 했을 때, 이사를 오며 인형을 버렸을 때,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마다 난 울어야 했다. 아빠 말씀이 옳았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언젠간 날 울게 만든다.

「베리베리 다이스키」 신지상


사랑해.

늘, 평생, 영원히. 그들이 읊조린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또 왜 그것을 믿었나. 영원은 허상인데 말야. 너는 어째서 그렇게 쉽게. 유한함에 두려운 약아빠진 인간들이 만들 어낸 자위 의식 따위에 불과한, 그럼에도 종종 그에 베팅해 보고 싶다는 욕망은 날 짓누른다. 아닐 걸 알면서도 희망을 걸어본다는 행위는 어찌나 내 아드 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지.


1. 많이 어렸을 적 아끼던 다람쥐 인형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까지 무언가를 애정해 본 적은 없을 만큼, 정말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몇 날 며칠 동안 울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같은 인형을 구해다 줬음에도, 그 인형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같은 인형이 아니었으니까.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겪어 본, 첫 이별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별이 아닌 작별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이별

서로 갈리어 떨어짐.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 결국 우리가 이별을 '극복' 한다고 하는 것은, 이별에서 작별로 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2. 농밀한 언어를 나누던 늦여름, 그 늦여름 밤의 꿈. 무더운 밤이 묻어 운 밤이라는 언어유희에, 난 그저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1인용 침대가 그리 좁게 느껴지지 않았던 네 자취방은 지금도 홍제역 근처 그때 그곳에 있을까. 말보로 비스타를 좋아하던 너는 나를 오래도록 앓게 했다. 담배를 혐오하던 내가 편의점 앞을 한참 서성이다 들어가 말보로 비스타를 구매해 입에 물어봤을 정도로 네게 흠뻑 취해있었다.

네게는 나 말고도 여러 명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새벽은 아직도 역겨울 정도로 생생하다. 내게는 너 하나뿐이었는데, 너에게 난 어떤 존재 였을까.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커져 버린 감정을 갈무리하기에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다. 사랑은 사람을 뒤흔든다. 한 개인을 무참히 짓밟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을 만큼. 네 취향이 내 취향이 되고, 어느덧 거울을 보면 내게서 네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때, 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입에서 옅게 느껴지던 소주 향, 함께 나눠마신 kgb. 이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토록 밉고 역겨웠던 너인데, 이제는 내가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너의 노래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음치였던 내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도 다 네 덕분. 계절이 수도 없이 지나고,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네 나이가 되어버렸다. 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사는 갔을까. 졸업은 했을까.


3. 사람으로 만나 사랑이 되고 사랑하며 저물다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 너와 함께 있으면 종종 목을 그어버리고 싶었다. 편안한데 불안했고, 사랑 하는데 혐오했다. 너는 기어코 확신을 주지 않았고, 그 불확실함은 곧 족쇄가 되어 내 숨을 조여왔다. 원할 때 언제든 찾으라며 뱉었던 말이 무색하게, 언제든 자기를 이용하라던 애교가 무색하게, 너는 예상보다 자주 사라졌다. 이용당한 건 나였다. 사라진 지 몇 달 만에 나를 찾아와 차에 태우곤 어김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뱉는다. 여전하구나 넌. 낡아빠진 차에서 더럽고 추악한, 수많은 이들과 맞추었을 입술로 사랑을 내뱉었다. 너의 손과 피부를 태워버리고 싶었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비릿함.

어김없이 내 허벅지를 쓸어 만지는 네 의도가 역겨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쩔 줄 몰라서 그렇게 뜨겁게 입을 맞췄나. 내가 쓰던 휴대폰 블루투스 목록 에는 여전히 네 차 스피커가 남아있다. 너는 유독 옷 벗기를 싫어했다. 땀에 젖은 천 조각이 힘겨워서 우는 것도 모른 채, 네 흰색은 주로 날카로웠고 내 살색은 주로 나약했다. 네 침대 위 벽지도 울다가 발가벗겨져 버렸다. 민음사 인간실격을 대충 올려서 가려두었다. 나는 네게 광대에 불과했으니. 나는 그 책을 단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4. 낡아 바래진 흰 건반의 자국은 흩어지는 한숨에 번져나 아득히 녹아내리는 기억을 지나쳐 기어이 나의 모든 것을 울린다. 유독 선선한 여름밤이었다.

왜 내 사랑은 늘 여름에 시작하는지, 참으로 이상할 따름이다. 네 작업실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평도 안 되는 그 좁은 곳이 내 이성을 흐리게 희석해 버렸다. 강렬하게 원하는 눈빛에 넘어가는 건 내 특기다.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라오는 노래 가사 중 나는 하나도 없다는, 그 볼품없는 사실이 꽤나 오래 나를 괴롭혔다.


5. 입술을 씹어 더 붉게 물들이면, 으스러진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면, 무채색이 잘도 붉게 타오를까. 또. 또. 또. 그 발정난 눈빛. 입을 맞춰오면 난 그저 분위기에 몸을 맡긴다. 소중하다는 말로, 좋아한다는 말로 잘 포장하면 알면서도 넘어가는 게 내 특기. 너는 너무 쉽게 간파해 버렸다. 외설적인 행위는 애매한 관계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미 쾌락을 맛봐버린 육체가 원래대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아픈 관계가 끝날 때마다 다짐한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이러고도 또 하면 그냥 바보지 내가. 술 조절에 실패하여 밤새 변기를 붙잡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그따위 볼품없는 금주 다짐보다도 약해빠져서는 말이다. 슬슬 기억이 옅어지면 나는 기꺼이 또 바보가 되기를 자처한다. 땅을 빌빌 기는 짐승마저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보다. 내 마음의 크기는 더럽게 크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나를 아프게 한다. 오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