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리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났다. 아니, 아직 젊다. 젊은 건 맞는데, 풋풋하고 앳된 그런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무언가에 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그런 나이. 어느 순간부터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이가 아닌 태어난 연도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 '띠'를 말할 나이는 아니니까. 주변에서는 결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고, 빨리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아기 사진을 보여 준다. 작년에는 청첩장을 질리도록 많이 받았다. 선배, 친구, 직장 동료 가릴 것 없이 코로나가 잠잠해지니 전부 결혼을 빨리하고 마음의 짐을 덜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평소에는 안부 인사 한번 없던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참 많이 받았다. 익숙한 번호로 온 문자. 그녀였다. 참 웃긴 게, 그녀의 목소리라던가 말투는 이제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번호 여덟 자리는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주소록에 들어가서 저장된 연락처를 클릭하면 당연히 전화가 바로 걸리지만, 나는 늘 010 제외한 여덟 자리를 직접 눌러 전화를 걸곤 했으니까. 일종의 정성 표시였나. 그렇게 수천 번은 두드렸을 그 번호가 기억에서 사라질 리가. 20대 초반, 모든 게 부족하고 어려웠던 나와 함께했던 네가 결혼을 한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우리도 결혼이라던가 영원한 기약을 입에 올리며 웃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형식적인 멘트가 담긴 청첩장을 하나 보내고, 몇 분 뒤에 짤막하고 진부한 멘트 하나를 더 보냈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절제해서 보내는 문자 같아 보였다.'나 결혼해. 와서 얼굴 보고 밥이라도 먹고 가.'보통 전애인에게 청첩장을 안 보내지 않나?

얘는 왜 보낸 거지?

상대방 심란해지라고 청첩장 보내는 경우가 있다던데 일부러 보낸 건가?

그보다 남편 될 사람이 있는 자리에 나를 초대하는 건 무슨 심리지?

미친 건가?

그렇다고 내가 위축될 필요가 있나?

뭐, 초대받았으니 가는 거고, 남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옛정 생각해서 축의금 좀 내고 밥 먹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청첩장을 보낸 의도를 알 수는 없었다.


결혼식 당일. 가기 전까지 생각이 참 많았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눈치 보지 말고 그냥 가자'였다. 스쳐 지나간 인연 중 하나에 불과하니 불필요한 감상에 젖지 말자고 한 다짐은 어디 갔는지, 막상 그날 예식장에 들어가니 잡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무슨 좋은 장면을 보겠다고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던 강남에 온 건지, 잘 꾸며진 예식장과 웨딩 사진을 보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피어오르며 기분이 조금 먹먹해졌다.

'남편 잘 만난 것 같아서' 드는 기분인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분인지 가슴이 꽉 막혔다. 남편이라는 사람 옆에 꼭 붙어서 하하호호 웃으며, 입꼬리가 귀에 걸린 그녀 얼굴을 보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원래 나는 이런 표현을 쓰기를 꺼려하지만, 딱 이 표현보다 적절하게 내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너는 나와 연애할 때 쓰던 애교 섞인 말투를 결혼할 사람한테 사용할까. 너는 아직도 '뿅'이라는 소리를 내고 전화를 끊을까. 너는 아직도 키스할 때면 몰래 눈을 뜰까. 너는 아직도. 너는 아직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 뭐 하냐. 싱숭생숭했던 기분과는 다르게 특별한 건 없었다. 거기까지는 일반적인 결혼식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정말 미적으로 완벽한 여자였다. 큰 눈, 오똑한 코, 올림머리까지. 하객 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꾸민 의상. 나의 본능적인 느낌으로 이 여자는 남편 측의 전애인임이 분명했다.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내 버릇을 개 못 준다고, 식이 끝나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너무 예쁘게 하고 오셨길래 신부이신 줄 알았어요. (웃음) (박장대소) 감사해요

끝나고 어디 가세요?

궁금한 게 많아요. 살다 살다 결혼식장 와서 헌팅당할 줄은 몰랐네요. (웃음)


식이 끝나고 한참 번잡스러운 틈을 타서 나는 그녀와 밖으로 나왔다. 사실 밥을 먹고 함께 나와 커피를 마시러 갈 생각이었지만, 그 결혼식이 내 경사인 것도 아니고,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녀 생각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또 시작된 호구조사.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어디 사세요?

...

오늘 결혼식에는 왜 오신 거예요?

(이게 핵심이었다.)

... 그러니까 걔가 진짜 나쁜 놈이라니까요. 바람을 두 번이나 피우고...

(찔렸다.) 무슨 생각으로 청첩장을 보낸 거지?

참 내. 괘씸해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