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서 동해역 가는 기차는 하루 네 번이 끝. 막차는 당신과 내가 알탕집에서 안부 따위나 물을 때 진작 끊겼다. 첫차는 일곱 시. 그때가 열두 시 반쯤이었으니까 어디 가서 머물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계단에 기대 노숙하기에는 긴 시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신이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여기 근처 계단에서 이야기하다 쪽잠이나 자요. 당신은 이런 경험을 언제 해 보겠냐며, 연인 사이에서도 선뜻 제안하기 어려운 '노숙'을 제안했다. 나도 고려하고 있던 안이지만 당신에게 제안할 용기는 없었다. 먼저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 준 당신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생각하는 바가 비슷했다는 점에서 내심 반갑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계단에서 쪽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취한 노숙인들의 술주정에, 알아들을 수 없는 싸움 소리에, 당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없었다. 맥주나 한 캔씩 마시며 시간을 때울까 고민도 했지만, 우리 행색에 계단에 기대어 맥주를 홀짝이고 있으면 노숙인으로 오해받기 딱일 것 같아서 관뒀다.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 당신의 복잡한 가정사를 들었다. 당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곤충을 싫어하는지,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이라면 사람의 큰 테두리를 먼저 알아가고, 작은 가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밟겠지만, 나는 당신의 사소한 것부터 알고 싶었다. 당신은 너무나 어렴풋한 사람이라 큰 테두리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막막했으니까.
당신에게 들은 사소한 취향을 듣는 동안 우리가 계단에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그만큼 당신이 편했고, 그 시간이 좋았다.
동해는 넓었다. 바다 구경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사실 가까운 영종도나 을왕리에 가면 됐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동해역으로 떠난 건, 단순히 바다'만' 감상할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기 동해도 사람 사는 곳이고, 별 특별할 건없지만 미지의 무언가가 펼쳐질 것 같았다. 훗날 당신 또한 그때 동해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함께 떠났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기차를 탔다. 우리는 기절한 듯 두 시간 반을 잤다. 신기하게도 동해역에 도착하기 5분 전쯤 눈이 떠졌다. 꼭 와야만 하는 곳에 온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동해역에서 내리고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서야 삼척에 도착했다. 삼척 바다는 조용했다. 언젠가 갔던 여수의 외진 해변보다 조용했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뭔가 알게 모르게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배도 고프고, 여벌 옷 한 장 없이 낯선 공간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니 너무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해 보였고, 나는 그런 당신 앞에서 불안을 내보이기 싫었다.
삼척 앞바다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해가 제일 잘 보이는 방을 잡았지만 결국 우리는 늦잠을 잔다고 해 뜨는 건 보지 못했다. 당신은 나보다 늦게 잠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잠들 때까지 듣지 못했던 음악이 당신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잠자리에 예민했던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 탓에 당신이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구경했다. 잠에 취해 곯아떨어진 당신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은 계속 가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평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숨이 턱턱 막혔다. 알고 싶지 않은 당신의 비밀, 어쩌면 나는 알 수 없는 당신의 역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당신의 큰 테두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해가 떴다. 깊게 잠든 당신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혼자 있고 싶었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깜깜하냐는 혼잣말을 하고 커튼을 걷으니 해가 중천이었다. 해는 떴는데 우리는 준비된 것이 없었다. 옷이 없었고 차가 없었다. 계획이 없었고, 확신이 없었다. 칫솔질을 할 때마다 솔이 뽑히는 싸구려 모텔 칫솔로 대충 양치를 하고 있으니 당신이 깼다.
너무 늦게 깼다. 해 보려면 하루 더 있어야겠다. 일단 우리 좀 나갈까요?
방에서 나왔을 뿐인데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 그래서 사랑은 뜬 건가?
먼 동해에 왔는데, 당신과 함께라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또 나름 드는 걱정에 고민하며 나는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는데 당신이 침묵을 깼다. 사랑이라는 게 말이에요. 연애라는 게 뭐 거창한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 삶의 일부인 거지. 사랑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런데 사랑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는 것 같아요. 웃기죠. 연애도 그래요.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 한번 알아가 보는 거죠. 생각이 많겠죠. 고작 얼굴 두 번 본 사람이랑 술 마시다 노숙을 하고, 동해에 오고, 같은 방에서 잠들고, 준비된 건 하나 없는 거 같고. 머리 아프죠?
그래도 뭐 문제 될 게 있나요?
그냥 현재를 만끽해요. 우리는 지금 동해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에게 홀린 듯 걱정이 사라졌다. 당신이 내뱉은 문장에 우리의 미래를 그렸으며, 결국 동해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졌다는 생각에,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런 내 꼴이 웃겨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좋아요. 우리 만나요. 계속 볼 거면 우선 어색한 존댓말부터 좀 놓죠. 사실 며칠 더 묵을 생각으로 왔는데,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 그대로 몸만 왔잖아요. 해가 제일 잘 보인다는 방에서 해가 뜨는 건 보지 못했지만, 해가 지는 건 함께 볼 수 있었다. 서로 내뱉는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당신과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추상적인 찝찝함이 내 가슴에 남아 찐득거렸지만, 어쨌든 우리가 동해에서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다는 데에서 온 만족감이 더 컸다. 그때는 그랬다. 앞으로 우리 사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성북구글싸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