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내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이라는 말.
언제 들어도 가슴부터 철렁거리고 오만가지 상상이 들게 만드는 말. 진실로 내게 잘못한 것이 있는 누군가가 사과를 건네 온다면 어떠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또, 나의 본능이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미안과 이 미안의 차이를 나는 알고 있다. 미안하다. 내가 오늘 입에 올리는 미안이라는 말은 그 미안이 아니라 이 미안이라는 점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이야기를 듣게 될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다시 또 미안하다는 말밖에 전할 수 없으리라. 나라는 사람은 아주 못돼 먹고 숨어 살기 좋아하는 놈이라서 일 년이 넘도록 성북구글싸개라는 필명 뒤에 숨어 살고 있다. 아직도 내 글에 내 이름을 거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지난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만 써대지만, 나를 스치고 지난 애인을 보기에 부끄럽지는 않은지 부끄러운 행동만 계속하고 있다.
미안, 내가 이런 사람이라 나는 아주 이기적이고 또, 타인에게는 엄격한 반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정도는 굉장히 높아서 가끔은 내가 미워질 때도 있다. 남들은 슬픈 영화를 보거나 이별할 때에 눈물을 흘린다던데, 나는 그랬던 기억이 없다. 아니, 이별할 적에 눈물 흘려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이별할 당시에 흘렸던 눈물은 애인과 헤어지는 상황 자체에 느꼈던 슬픔 때문이 아닌, 이 세상에 내 편 하나 남지 않은 나의 처지가 너무나 처량해서, 그런 내 처지를 보고 있자니 내가 안쓰러워져서 눈물을 흘린 경우가 전부였다.
미안, 내가 이런 사람이라. 이제야 고백한다. 스물 언저리에 나와 연애했던 당신들에게 보인 나의 눈물은 우리 사랑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데에서 흘린 아쉬움이 아니고 스스로에 대한 자기연민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가끔은 혼자 술을 마신다. 이제 젊음을 담보로 깡소주를 마실 나이는 아니지만, 속 좀 버리면 어떻냐는 생각으로 소주 두어 병에 오뎅국 하나를 놓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남들 앞에서는 울 수 없으니까 그때 눈물을 흘린다. 자퇴한 학창 시절부터 스물과 가출, 얼룩이 많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가끔 생각나는 나의 군시절부터, 제대 후에 있었던 방황과 몇 점의 옛사랑 이제야 조금은 먹고살 만해졌는데 지난날을 돌이킬수록 왜인지 모를 서글픔 때문에 눈물이 난다. 미안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아직도 어린 티를 못 벗어내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언젠가 내가 더 어른이 된다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면 그때는 무언가 달라질까
미안, 내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하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러운 행위였다고, 그렇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한때는 없으면 못 살 정도로 아꼈던 우리가 서로의 이름마저 가물거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너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너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입을 맞추고, 그 입에 사랑을 올리고, 몸을 섞은 적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착각이 아닌 분명한 진실. 나는, 아아, 나는 미안하게도 그런 너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너를 만나기 훨씬 이전에, 그 이전에 나의 처음을 줬던 그 여자의 이름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너의 첫 남자였다면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을는지.
미안, 내가 이런 사람이라. 가끔은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을 몽땅 포기해 버리고 싶다는 점에서 오는 포기 욕구는 아니지만, 무력감과 실망에 젖어 사는 시기가 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들 묻지만 그럴 때마다 별일 없다며 둘러댄다.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니까.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하기에는 남부끄러운 이야기투성이다. 전애인의 처음을 앗아간 남자가 생각나서 화가 났다든가, 그 애의 과거에 아직도 내가 얽매여 있다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나는 방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미안하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하다. 네가 사랑했던 나는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미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