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유은을 만났다. 지난 만남 이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유은은 반년 가까이 준비하던 어느 시험이 끝났다며, 고생한 본인을 위하여 한 며칠 이곳저곳 여행하겠다고 했다. 그런 김에 얼굴이나 보자는 유은의 제안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홀린듯이 수락하고야 말았다. 너를 갈망하는 나의 감정을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감히'라는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감히 내 감정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간간이 오는 네 문자는 그 어떤 연락보다 반가웠고, 너를 만나기 전날 밤에는 마치 스물 언저리에 했던 연애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설렘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설렘을 주어 나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너는 나를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8년 전의 우리였다. 생각도, 태도도, 깊이도 바뀐 것 하나 없었다.

아니, 내가 좀 많이 바뀌었나. 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는 '진짜 좋다'는 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뱉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했던 말인데 너는 어떻게 느꼈을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마음과 생각의 정도가 비슷한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는 생각을 아마 다들 살면서 한 번쯤은 해 보았을 터인데, 나와 유은은 우스갯소리로 '복제품' 수준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서 만났지만 눈 깜짝하니 시계는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 만남에서 열두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원 없이 떠들었기에 이번 만남에서는 더 할 말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얼굴만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웃음이 나왔고,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고, 술은 달았다. 나는 유은의 눈만 바라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닮았으니까.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너도 했고, 내가 하는 고민을 너도 했으니까. 아니, 너도 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고민을 꺼내면 어떤 답변이 돌아올지도 잘 알았다. 네 고민에 대한 해답은 곧 내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달콤한 위로보다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해서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나는 유은이 필요했다. 아마 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신기하리만큼 닮았으니까.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그렇게나 술을 마신 것이 얼마 만인지. 언젠가 유은이 취한 내 모습을 보고는 '취한 모습은 매력 없다'고 말한 뒤로 나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다. 나는 술에 취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구나 싶었다. 내 얼굴은 점점 물들기 시작했고 유은 또한 그래 보였다. 빤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그 얼굴을 흘깃흘깃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발그랗게 달아오른 유은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아름다운 그 입술에 입맞춤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끌어안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사랑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 술을 마셨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기 위해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술로 억눌렀다. 말할 수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가게 마감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몸을 맡겨 우리는 발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갔다. 사람 하나 없는 길에서 노래를 몇 곡 끝내 주게 부른 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네 시가 넘었다. 열두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떠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유은은 전날 밤 시험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 잡고 잘까?

약속할게 진짜로 잠만 자자 그러자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우리는 모텔로 들어갔다. 당시 연애할 적에도 모텔은 영 별로인 것 같아서, 유은과의 사랑을 그곳에서 피우기 싫어 몇 번 가 본 적 없는 모텔에 들어갔다. 객실 카드를 받아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씻었고 네가 나중에 씻었다. 우린 둘 다 옷을 입고 나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성인 남자 주먹이 대여섯 개 들어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누운 채로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그 침묵과 얼어붙은 분위기를 대충 웃음으로 때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거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미친 거지.

그냥 살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자자 우리.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나는 그 싱글 침대에 누워 생각을 했다. 망상했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고민이 고민을 낳다 보니 그 망상의 정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망상을 그만두다 보면 행동할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건 안 될 것 같아서, 유은을 오늘만 보고 안 볼 것이 아니라 정말 오래 보고 싶어서. 우리가 다시 사랑할 수 없다고 한들 내가 유은을 외사랑이라도 하며 곁에 남겨 두고 싶은 마음에 생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냥 앞뒤 상황을 신경 쓰지 말고 저질러 버릴까. 그냥 너를 사랑해 버릴까. 대체 왜 우리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다 너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빠져버린 것일까. 차라리 만나지 말걸. 그냥 만나지 않고 살았더라면 너는 내게 누구나 가지고 사는 젊은 날의 가슴 아픈 사랑쯤으로, 가끔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수준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평생에 걸쳐 그리워하고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사랑한다면 이전 연애에 있었던 과오를 청산할 수 있을까. 이제 나도 결혼을 생각해야 할 시기인데, 지금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결혼은 누구랑 해야 하는 것일까. 결혼을 꼭 해야 하나. 결혼을 언젠가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할 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유은에게 들었던 것이 유일하니까. 만약 내가 결혼해야 한다면 그 상대는 유은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그냥 유은과 결혼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영화 '수리남'에서 하정우가 그랬던 것처럼 '나와 결혼해 달라'고 저지를까.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유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얘가 무슨 소리를 하냐며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짓는 특유의 웃음을 짓겠지. 그때 입을 맞출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우리는 정말 잠만 잤다.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우리는 정말 잠만 잤다.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에 동시에 일어났다. 몽롱했다. 그날 밤에는 잠들기 전 내가 누워서 했던 모든 망상이 꿈으로 실현되었다. 한 편의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재밌는 꿈을 꿨다'는 핑계로 유은에게 연락이나 해볼 텐데.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했다.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꿈이라면 그냥 깨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다. 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불안하지 않았고, 다른 인연들에게는 엄격히 들이대던 잣대도 너라면 예외였다. 다시 연애한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 텐데.

후회만 가득한데 어쩌나 이미 지난 일인데. 헤어질 시간이 되니 당연해야 할 이별이 당연하지 않은 무언가처럼 느껴졌고, 내 감정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되어 괜히 미안해졌다. 미안한 감정이 컸다. 헤어질 무렵 유은과 나누었던 대화는 글이 아닌 대사로 쓰려 한다. 그래야 내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 같으니까. 작별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보며 유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유은의 표정이 선하게 그려져서, 나와 같은 생각일 것 같아서. 그 눈빛을 보면 정말 힘들어질 것 같아서.


우리가 잠만 잤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나는 너를 오래 보기 위해서 정말 노력했어.

느껴졌을는지 모르겠지만 말야.

알아. 고마워 정말.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말야.

재밌었어 정말.

이제 넌 어디로 갈 거야?

글쎄. 발 닿는 곳으로 가 보려고.

참 소설 같은 마무리다. 그치?

그러게. 야, 글로 열심히 나를 소비해. 꼭.

그럴게. 글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 잘 가렴.


목적지는 어디야?

여수에 가 멀리 멀리 가려구 지금 버스 안인데 다행히 여기는 비가 안 오네 내가 버스서 자는 동안 비가 왔던 것이려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네가 말했던 것처럼 글로 풀어야지 열심히 쓸게 아 고마워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