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미안합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기꺼이 축하해 주지 않고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전교 1등을 했을 때도 공부는 상관없으니 사람이 먼저 되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정의내리던 '사람'은 '본인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나는 이제 '덜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다 집안을 기울인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우리 집에 돈이 많은지 적은지도 몰랐던 그 때가,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가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몰랐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시고서는 거실에서 사기꾼에게 전화로 욕을 했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지만 그때 저는 참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타인을 위해 사셨지요.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5만 원 여러 장을 기꺼이 선물하시고, 길에서 나물 파는 아주머니들에게 남은 나물 다 달라고 하시던 아버지가 그때는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명품백 하나 없는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정의에 늘 우리 가족은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회사에서의 이권 다툼에 양보하고 퇴사하셨을 때도, 하나도 남지 않는 자선사업으로 빚까지 떠안았을 때도,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과연 아버지는 옳으셨습니까? 지금은 잘 사는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성인 된 선물이라며 벤츠를 선뜻 사 주시는 친구의 아버지가 부럽습니다.
오피스텔 월세 130만 원을 매달 내주시는 친구의 어머니가 부럽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돈 앞에서 어디까지 추해질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돈을 밝히는 제게 늘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좀 더 크면 베푸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타인에게 베푸실 때, 배를 곯으며 몰래 눈물 훔치시던 어머니를 보며 자라왔기에 평생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남들 따라 괜한 돈 쓰지 말라며 어린 제게 10만 원 넘는 맨투맨 하나 사지 못하게 하셨던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남들 다 입는 옷 한 벌 못 사 입는 우리 집이 창피해서 짝퉁을 입었습니다. 그 짝퉁 옷이 제게는 얼마나 소중했는지 아버지께서는 평생 모를 것입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부자들을 동경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회계사가 되어 큰돈을 벌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치라며 싫어했던 명품백을 어머니의 어깨에 걸어드릴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삶은 누군가에게 한 줄기의 빛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끝없는 어둠이었으며, 어머니에겐 눈물이었고, 아버지가 자선사업을 하겠다며 손 벌렸던 할머니에겐 지옥이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당신이 밉습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소식을 듣는 순간 숨이 막혔지요. 벌써 부모님과의 이별이 다가오는 나이일까. 내일은 그 장례식에 들르려고 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과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을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아버지 미안합니다. 이제 내 목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목표는 '내 가족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평생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말하셨던 '베풀며 살아라'는 말은 이젠 지킬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제야 조금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