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오래전부터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당시 만나던 애인의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였다. 다들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라는 그 대학. 노력파보다 타고난 영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그 대학에서 예술을 하던 당신이 눈에 띄었다. 당신이 궁금했다. 그 기분은 당신과의 섹스나 키스를 원하는 정이 아니었다. 그때 든 감정은 호감의 감정도, 경외의 감정도 아니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신기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당신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생겼다. 매번 연애를 쉬지 않는 듯 보였지만 당신이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무얼 하고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신은 이따금 동해로 떠났다. 그런 당신의 두 눈에는 많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나와 똑같은 담배를 피웠다. 당신은 내가 싫어하는 위스키를 즐겨 마셨다. 당신이 하는 두 가지 예술 중 하나는 문학이라는 점이 반가웠다. 그런 당신이 하는 문학은 너무 날카로워서 나는 당신의 글을 한숨에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마흔 개 좀 안 되는 피드를 여러 번 읽다 보면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윤곽이 잡힐 줄 알았다.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알게 될 줄 알았다. 며칠 당신을 지켜본 결과 내린 결론은 '모르겠다'였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 궁금증은 당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더 커지면 커졌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당시에 만나던 애인이 있었다. 애인 이야기를 잠깐 해 볼까. 우리는 어쩌다 만나 저쩌다 사랑하게 된 사이였다. 우리는 전공이 달랐고, 살아온 길이 달랐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고 관심사가 달랐다. 달라서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그녀와 유치하고 해맑게 치는 장난도 좋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함께 마주 앉아 칸트를 논한다거나 현시대 개인주의화 현상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해 논하는 그런 깊은 대화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면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진한 사람과 연애하고 싶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가벼웠다. 유행성 소재나 가십거리가 오가는 대화. 그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유행에 뒤떨어지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술 한잔하고 나누는 진지한 대화는 어디선가 뚝뚝 끊겼다. 어리숙한 배우 둘이 나오는 단막극의 대본처럼, 내가 말하면 그녀가 답하고, 그녀가 말하면 내가 답하고 흐르는 정적. 이어지지 않는 대화 흐름을 겨우 주도하여 끌고가 보면, 끝에는 항상 당신이 있었다.

아, 맞아. 그 친구는 요즘 잘 지낸대?

그냥 조금 아프대. 지금은 나았고. 자세한 건 모르겠어.


다시 당신으로. 당신은 신비로웠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은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신비로움이 아니었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팔로워가 한 10만 명쯤 되는 그런'나 좀 느낌 있고 감성적인 사람이에요. 성수랑 을지로 열심히 다니고, 리움도 자주 가는 편이에요. 로데오 같은 시끄러운 곳은 별로예요. 이번 가을에는 가방 하나 샀어요. 셀린느 거로. 지갑은 마르지엘라를 쓰고, 노트북에는 꼬-옥사과가 그려져 있어야 해요. 독서와 영화를 즐기는 편. 저 꽤나 여리여리한 사람이에요.'와 같은 '만들어진' 분위기가 아니라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 당신과 가까워지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 물론 내가 연애를 하지 않을 때라고 가정했을 때 말이다.


당신은 무뚝뚝해 보였다.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 감정을 철저하게 숨기고 사는 사람 같았다. 나는 당신의 웃는 사진을 한 장도 볼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당신의 글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당신의 글은 허구가 아닌 것 같았다.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당신은 내게 너무 멀고 어렵지만 흥미로운 존재였다. 당신과 삼 년 동안 같은 과였다던 나의 전애인도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조금 아팠던 사람'이라는 실없는 단서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당신은 곁에 두면 위험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당신과 한번 지독하게 엮어 보고 싶었다. 그랬다. 당시에는 당신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고, 내가 사랑을 하던 중이라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당신은 나만 아는 소설 속 주인공 같았다. 당신을 떠올리며 망상에 빠지고, 애인을 두고 그런 공상에 빠진 내가 또 미워지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만나는 애인과는 헤어졌다. 사랑은 늘 장황한 서사를 가지고 이별은 언제나 어렵지만, 지나고 정리하면 이렇게 달랑 한 줄로 남는다는 사실에 맥이 빠지긴 한다. 나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머무는 사랑이 있었으면 했다. 사랑을 가지고 소설이나 지어 평생을 먹고살게. 그런 사람은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니 가슴 뛰던 것들이 하나씩 기억에서 사라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수만 번은 주고받았을 나의 전애인의 얼굴도, 말투도, 처음 갔던 카페 이름도, 당신이라는 사람을 처음 전해 들은 그날 감정도, 당신에게 궁금했던 것들도, 당신의 이름도, 그리고 당신까지. 한동안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날 회기에 가기 전까지는.


회기 앞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데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누구지?

안면 있는 사람인데.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게 당신이었다. 아, 그래. 나는 여태까지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미스테리한 당신에게 빠지면 왜 다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당신의 눈웃음을 보고 그 의아함은 싹 사라졌다. 다들 그 미소에 홀렸던 거구나.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미소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당신이 지은 옅은 미소는 깊게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무기였다. 반가웠다. 반가워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순간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하마터면 당신에게 다가가 말을 걸 뻔했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날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에서 여자에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그날이 될 줄이야. 심지어 그 장소가 열댓 명 정도 들어가면 만석이 되는 작은 술집일 줄이야. 고민을 했다. 내가 한 고민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도 될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장을 던져야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까'였다. 당신과 내가 엮이는 건 필연이었으니까.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러고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첫마디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저 사실 한참 전부터 그쪽을 만나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뵙게 되었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은 내가 던진 말이 뻔한 헌팅 멘트인 줄 알았을 것이다. 천사가 왜 이제 나타났어요, 날개 뗀 자국은 어디 있어요?

와 같은. 당황스러워하던 당신 표정을 아직 잊을 수 없다. 나는 기회를 틈타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당신을 알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호기심을 느꼈는지, 당신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얘기했다. 당신은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당신은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을 먼저 보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의 표정을 의식하며 이야기했다. 미소가 더 옅어질 때는 등이 서늘해졌고, 미소가 좀 짙어질 때면 엄마에게 막 떠드는 아이처럼 신이 난 채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글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흥미로워했다.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던 당신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뱉은 첫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신기하다. 이런 우연이 있네요. 이야기 재밌어요. 조금 더 들려줘요. 성북구글싸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