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까지 가는 길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억이 아닌 기억 정도가 될 성싶다. 당시 어렵고 힘들었던 일은 곧 나의 기준이 되고야 말아서, 웬만큼 어려운 일을 할 때에도 '그래, 이까짓 거, 그때 그것도 했는데 이걸 왜 못 해.'라고 하며, 스스로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게도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는 기억이 몇 있는데, 그것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제는 그보다 더 버겁고 어려운 일도 많이 겪은 나머지 닳고 닳아서 상기하며 쓸 만한 수단이 되지는 못하지만, 나의 낡아빠진 추억 하나 펼쳐 보려고 한다.


역전까지 가는 길 몇 해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군 문제를 해결하고 대학으로 돌아와 복학한 지 얼마 안 된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니 뭐니 하는 핑계로 번잡스럽기 짝이 없는데, 가족 복이 통 없는 내게 오월은 참 고통스럽기 짝이 없어서 항상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해 오월도 그랬다. 다음 주면 어린이날에 어버이날이라고 동네 어디를 가나 온통 가족 선물을 팔아대고 있고, 그따위 것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쪽 편이 불편하고 어딘가 죄지은 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가정사를 들은 적이 있기에 착잡한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시 만나던 애인은 내게 어디 멀리 떠나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하기사, 스물이 되고 서울로 내려온 뒤로 본가에 들를 일도 없어 서울을 떠난 적이 없고, 학업과 일 따위의 핑계를 대며 그 흔한 서울 근교 한번 가 본 적이 없었느니, 그 제안은 솔깃하게 다가왔다.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나마 타향살이를 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경기도 언저리에서 했던 것인 데다가 외박이나 휴가를 나올 때면 늘상 서울에 머무르곤 했으니 말이다.


역전까지 가는 길 "어디로 가 보고 싶어? 나는 아예 멀리 떠나는 것도 좋아." "그러게. 기왕 떠나는 거 기차 타고 멀리 떠나자." "어디가 좋을까." 깊은 고민은 오히려 초라한 결론을 내기 마련이다. 한참 고민한 끝에 선택한 여행지는 조치원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몇 해 전, 신도시 출범이니 뭐니 하며 신설된 세종이라는 도시에 속한 작은 동네라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 조치원이라는 이름이 끌렸다.


역전까지 가는 길 영등포역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가면 도착하던 그곳. KTX는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었던 탓에 무궁화호에 몸을 실어야 했고, 그마저도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나 한 주의 시작을 앞둔 일요일에는 그곳에서 대학 다니는 대학생들이나 터를 잡아 열심히 살아가는 직장인들 탓에 입석 자리나 겨우 난다는 그곳. 도착한 조치원역은 역이라는 이름보다는 정류장에 가까운 공간이었고, 근처에 군부대가 있는지 군복 입은 군인도 몇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군에 있을 때 연기군 언저리에 부대가 하나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역전에는 한때 오갈 곳 없던 아가씨들이 재미깨나 봤을 법한 다방과 여관이 몇 있었고, 무엇을 위해 배회하는지 알 수 없는 노인들도 있었다.


역전까지 가는 길 조치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온종일 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갔던 터라 나는 애인과 시내로 나가 보기로 했다. 조치원에서 시내라고 하면 그 초라한 역전이 전부에 불과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았을 때, 조치원도 세종의 끝자락이니 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좀 안 되게 가면 신도시라 불리는 세종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세종에 가기로 했다. 생긴 지 몇 해 되지 않은 호수공원에 가서 산책을 좀 하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강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조악한,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여느 공원들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아쉽고 부족한, 아무튼 그 공원을 둘러보는데 마치 그것이 내 처지와 닮은 듯하여, 애써 가꾸어 선보였는데 시원찮은 평가나 받는 것이 나와 닮은 듯하여,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역전까지 가는 길 "좀 걸을까?" "걷고 싶어? 그러자. 여기 자전거도 있는 것 같은데." "걸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역전까지 걸어갈까? 길도 있고 세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야." 버스를 타고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리던 그 거리를 걸어서 가자는 갑작스러운 애인의 제안에 대답을 망설였지만, 그래, 걷자 싶었다. 걸으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걸으면 얻는 것이 있지 않을까, 걸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나는 삶에 있어 드는 부담이라든가 고민 따위에 대한 무게를 '걷기'에 전가하며, 그 행위가 끝나고 나면 나는 무엇이라도 깨닫는 것이 있지 않을까, 당장에 드는 상념을 회피하려 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서울의 것에 비하면 한참 못하지만, 신도시 부근은 조치원에 비하여 그나마 치안이 좋았던 탓에 해가 지고도 환했던 반면, 그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가로등 하나가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전까지 가는 길 12km 정도 되는 길을 걸으며 처음 2km 정도에서는 벌레 때문에 곤욕깨나 치렀던 기억이 있다.

무슨 벌레가 그렇게나 많은지, 얼굴이고 뒷덜미고 다리고 가릴 것 없이 붙는 바람에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2km를 걸을 때에는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기고야 말았다. 결국 내가 걷자고 결정한 일인데 늘상 그렇듯 나는 지레 겁을 먹고야 만 것이었다. 나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무엇 하나 기세로 꺾으며 끝까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마무리한 적이 없었다. 다음 2km를 걸을 때 갑자기.

"걷고 싶다고 한 이유가 뭐야? 정리? 아니면 미션 비슷한 게 필요했나?" "글쎄, 조금 더 걸어야 알 것 같은데—"


역전까지 가는 길 그 2km를 걸을 때는 내가 실존하는 이유와 현재처럼 죽지 못한 채로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 또한 사랑이 내게 미치는 영향과 나는 사랑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는 나를 싫어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의 애인마저 나를 떠나는 그 순간에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말이다, 아, 그날이 온다면 그 물음 또한 부질없는 고민의 편린으로 말미에는 삭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강이 보였다. 강이었다. 몇 시간 전, 그 신도시에서 본 조악한 인공 호수나 흉내 낸 강 따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생긴 그런 '진짜 강'이었다는 말이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를 제외하면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외진 길목에서, 나는 마치 대자연 속에 고립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서는 강을 끼고 빽빽이 자라 있는 울창한 나무숲에서 세상과 고립된 채로 수 세기 살아온 원시 부족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있으면 안 될 공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 강가를 중심으로 하여 이미 자리를 잡아 '소유'하고 사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것보다 무슨 대단한 오락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회적인 환락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역전보다도 못한 그저 숲에서 말이다. 섹스?

혼음?

수음?, 사냥?, 아니면 저들도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즐기고 있는가?


역전까지 가는 길 그 존재할는지도 모르는, 아니,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이들에 대한 존재가 내 머릿속에서 확신 비슷한 감정으로 자리잡았고, 문득 겁이 났다. 그들이 튀어나와 너와 나를 잡아가고, 우리는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기고, 우리를 향해 겨눈 뾰족한 창이라든가 화살 따위에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어쩌면 우리 또한 저들의 세계에 편입되어 살아가야 할 경우는?

만일 잡혀간다면, 그곳에는 우리와 비슷한 포로 처지의 현대인들이 존재할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 사랑의 끝은 어찌 되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또 상상하고 있었구나. 참 신기해. 상상에 한 번 빠지면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듣지 못하니 말이야. 우리 서둘러야 해. 아직 절반밖에 오지 못했어."


역전까지 가는 길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발바닥이 쑤셔 오기 시작했고, 시골 바람은 꽤나 시려웠다. 나는 외투를 챙기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은 접어두고 걸은 지 오래였다. 그 거리를 걸으며 철학적 고찰을 하겠다는 다짐은 배부른 소리였다.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시작하자고 한 그 '걷기'에서 벗어나고 싶았다. 빛이 필요했다. 나도 힘들어 지치는데 애인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걷는 거 있잖아. 걷다 보면 무언가 정리되고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걷다 보면 나아질 줄 알았고, 정답이 보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걸어도 걸어도 나는 여전히 나인 것 같아. 고작 8km 정도 걷고 무슨 대단한 깨달음 얻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인 것일까." "우선은 걷자. 우리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잖아."


역전까지 가는 길 그래. 맞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공간이 안위의 불확실에 대한 공포 속에서는 돌아가고 싶은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서울로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치원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걸었다. 돌아가기 위해 걸었다. 그날 낮, 역전에서 본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어느 군부대를 지나, 가로등 하나 없고 양옆으로는 논두렁이 펼쳐져 있는 옛 시골길을 지나, 외양간에서 새어 나오는 빠알-간 빛에 스산함을 느끼고, 걷고 또 걷다 보니 60년대 시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마을이 보였고, 그 마을에 울려 퍼지는 개 짖는 소리를 피해 발걸음 소리를 줄이며 또 걷다 보니— 아니, 그 사이에 또 몇 가지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기억의 단편은 세월이 오래 지난 나머지 바래 낡아 없어졌을는지 모른다.— 불빛이 보였다. 사람이 보였다. 걸으며 수도 없이 본 들짐승이 아닌 분명 사람이었다. 의문에 대한 결론이, 그토록 나를 괴롭게 만들던 그 의문에 대한 결론이, 답이 나오지 않아 걸었으나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줄만 알았는데, 마침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서 반드시 죽음을 경외하고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나—


역전까지 가는 길 역전에 도착한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잔뜩 흘린 땀이 말라서 입고 있던 옷은 굳어가고 있었고, 눈두덩이와 뺨 언저리부터 발목까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에게 물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배가 고파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애인과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끼니를 때우려 역전 24시 분식점에 홀린 듯 들어갔다.

"라면 두 개 주세요." "라면이 다 떨어져서— 떡만둣국은 어때요?"


역전까지 가는 길 무슨 분식점에 라면이 다 떨어질 수가 있다는 말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의문을 가질 힘조차 없었다. 평소라면 돈 주고 시켜 먹지 않을 음식이지만, 그날따라 '떡만둣국'이라는 그 이름이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나와 애인 앞에 놓인 음식이 떡만둣국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음식이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꽉 찬 만두소와 육수가 적당히 스며들어 간이 적당히 되어 있던 그 만두는, 시판 만두가 아니라 직접 빚은 듯해 모양이 제각각인 데다가 쫄깃하던 만두와 적당히 퍼져 씹는 맛이 좋았던 그 떡은 얼마나 맛있던지. 어쩌면 그날의 만둣국은 만둣국 그 이상의 보상과도 같았으리라.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 자체로의 가치를 넘어 내가 살아 있음과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아낸 뒤에, 12km나 되는 그 대장정을 거친 내가 비로소 생에 대한 도약의 값을 치르고 받은 보상이 아닐는지. 지금도 가끔씩 그날의 감회에 젖어 노포 분식점에 갈 때마다 떡만둣국을 시키곤 하지만, 그 맛을 내는 곳은 찾지 못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사실 별다른 것 없는 만둣국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리의 피로와 나의 고조된 감정이 그 맛을 미화시킨 것이 아닐 성싶다.


역전까지 가는 길 "어— 코피 난다." 나는 채웠지만 애인은 흘렸다. 아니, 나도 무언가 다 흘려보냈기에 오히려 채워졌다고 느낀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래. 우리는 조치원에서 모든 것을 다 흘려보내고 왔다.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치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