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섹스 이야기긴 파마머리에 다크브라운 염색. 파마에 염색까지 했지만 머릿결은 부드러운. 뺨만 한 귀걸이에 짙지만 역겹지 않은 향수 향기가 지나온 자리에 남는 사람. 본래 피부색과 딱 맞아떨어지는 파운데이션, 그러니까 가끔 릴스에 등장하는 어느 절대 색감 예술가처럼, 피부색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게 잘 화장된 피부. 긴 아이라인과 명암 짙은 눈화장. 쉽게 벗길 수 없어야 한다. 코트를 벗기면 나오는 가디건. 단추 다섯 개를 풀면 나오는 얇은 캐시미어 니트. 니트를 벗기면 나오는 후크 세 개 달린 브라. 인스타그램에는 아이폰 XS로 찍은 듯한 사진이 즐비하고, 피드를 보다 보면 사이버 서울 투어가 거뜬한 그런 사람.


이런 사람과 이런 섹스를 하고 싶었다. 아니, 섹스라기보다는 사랑하고 싶었다. 이런 사람에게 내 처음을 주고 싶었다. 남자의 처음이 뭐가 중요하냐 싶기도 한데, 처음이었으니까. 바라는 건 많았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고.

언제였더라. 그해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위치한 모텔-웃기게도 그 모텔 이름에는 명동이 들어가 있었다-에서 그날 처음 본 사람에게 내 첫 섹스를 줬다. 섹스를 할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는데, 그날 그 여자와 섹스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 그래도 그렇게 섹스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사람 본능이라는 게 웃기지. 또 섹스는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한 '우리의 공간'에서 섹스하는 것이 로망이었는데. 그날 노가리 골목에서는 싸움이 나서 경찰차가 왔고,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에, 옆 방 남녀가 울부짖는 소리에, 정신 없는 와중에 방은 알코올 냄새로 가득했고, 그녀는 속이 안 좋다며 침대에 쓰러지고.


중단발에 탈색된 머리. 머릿결이 안 좋아서 푸석푸석했고, 피부 뜬 화장에 비좁은 방. 춥지 않았던 날씨 탓인지 단추 네 개짜리 얇은 가디건을 벗기니 보이는 스포츠 브라. 이성보다는, 이상보다는 본능이 앞섰다. 내가 '처음'에 부여했던 의미는 너무 컸던 거라며 스스로를 욕했다. 그래야 그 섹스가 정당화될 것 같아서. 결국 '내 방'도 '네 방'도 아닌 '모두의 방'에서 나는 첫 섹스를 했다. 허무하고 후회되던 그날.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는 그 말이 아프게 느껴지던. 그게 내 첫 섹스였다. 조혁


그러니까 선섹후사를 했는데요

"사랑하는 사람 하나 만나 결혼해서 잘 살면 돼.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해 주는 말인데 요즘 애들처럼 아무 남자랑 막 자고 그러면 안 된다. 여자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야 돼." 엄마가 늘 내게 해 주었던 말. 구시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엄마는 아빠와 사이가 좋았다. 선봐서 결혼하는 게 당연했던 그 시절. 엄마는 대학에서 한눈에 반한 아빠에게 푹 빠졌단다. 26개월이나 되는 아빠의 군대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고, 그 뒤로도 5년을 더 만나 결혼했다. 말로만 하는 첫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진짜 첫사랑이었다고.


나는 살면서 아빠가 엄마에게 큰소리를 낸 적을 본 적이 없고, 엄마도 아빠에게 투정 부리는 일이 없었다. 두 분이서도 곧잘 놀러 다니시던 탓에 종종 모르는 사람들은 불륜 커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고. 사랑 듬뿍 오가는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탓인지 나도 내 운명의 단짝을 찾아 평생을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야, 요즘 세상은 옛날이랑 달라. 남자 많이 만나 봐야 좋은 사람 고르지." 아닌 걸 알면서도 젊음을 방치하기 아까웠다.

언제까지고 내 운명의 단짝이 나를 찾아와 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꼭 운명의 상대가 나를 찾아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찾으면 되지! 술자리가 문제였다. 간만에 만났던 친구들이 문제였다. 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회피하고 싶지만, 사실 내가 문제였던 거다.

뭘 믿고 처음 본 사람에게 내 처음과 전부를 준 걸까. 알딸딸한 기분에 시끌시끌한 분위기. 얼굴은 후끈거리고 초점은 흐려지고, 마치 배속을 감은 것처럼 정신없이 흘러갔던 술자리.


합석을 하잔다. 공짜 술 얻어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냥 재밌을 것 같았다. 손에 힘이 풀려 자꾸만 음식을 흘릴 때마다 닦아 주고, 술 따라 준다는 핑계로 손을 잡고, 입술에 뭐 묻었다며 직접 톡톡 닦아 주던 그 다정함. 다정함이 아니라 다정함을 가장한 플러팅. 주말이 아니라 방은 많았고, 나는 그에게 나를 맡겼다. 찝찝한 시작.

나 처음인데... 나도 처음이야 거짓말. 아프고 울렁거렸다. 해가 뜨면 그를 사랑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껏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일 것 같았으니까. 그래. 내 사랑이 잘 풀렸다면 이런 글을 쓸 일도 없었겠지. 첫날 눈 맞아서 밤을 보내고 깊은 사랑에 빠지는 그런 구전설화 속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