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씨가 더워지고, 햇살이 강렬해지고, 옷이 얇아지고, 피부가 타고, 그래도 선크림은 바르기 귀찮고. 선풍기를 꺼내고, 에어컨을 켜고, 사람들의 짜증이 많아지고, 뜬금없이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지고. 반팔은 이미 삼월부터 입었고, 오월만 되어도 '이제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여름인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여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더 더워질 것 같아서 그런가. 그런 초여름이 지나 유월이 되면 이제 더는 여름을 미룰 수 없다. 유월쯤 되면 여름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 인정하기 싫지만 이제 길고 긴 여름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는 여름이 가을보다 사랑 피우기 좋은 계절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여름이 봄보다 더 푸른 계절일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는 여름이 꼭 나오고, 누군가의 사랑에는 여름이 꼭 들어가 있다. 청춘이라는 단어. 이제 질리기는 하지만 청춘은 봄보다 여름에 더 어울리는 단어 아닐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여름은 최악이고 난잡하다. 나의 여름은 대개 최악이었다.


2. 스물이 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맘때만 되면 성장통을 겪는다. 스무 살 때 떠오른 '앞으로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질문은 해가 거듭될수록 '앞으로 뭐 먹고살지', '나는 뭘 잘하지?', 다음은 '그래서 뭘 해야 하지', 그리고는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러다 지금은 '내 젊음을 베팅해도 될까'가 되었듯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맘때만 되면 고민과 잡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신기하게 여름이 지나면 내가 했던 고민들은 확신이 되고 내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재료가 되어 사라진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게 경험치로 녹아드는 것이겠지. 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필연이고 세 번째부터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 이제는 유월에 드는 생각에 익숙하다.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늘 그랬듯 이 시기가 지나면 나는 성장하니까. 나는 항상 고민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감정은 적응이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이 들 때면 두렵고 막막하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3. 나는 그해 여의도 한강에서 무슨 상념에 잠겼나. 나는 그해 망원에서, 나는 그해 영도에서, 나는 그해 당산에서 합정 넘어가는 2호선에서 무엇 때문에 그리도 버거워했나. 지나고 나면 사라질 고민들은 그만큼의 고민을 했기에 무게가 줄어든 것일까,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증발한 것일까.

4. 가끔은 과거의 나를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대체 무엇을 믿고 어떤 깡으로 저질렀나 싶은 일이 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 그렇게 무대포로 살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오 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가 할 일에 확신이 있으니까.


5. 옛날에.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지금이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안 됐다. 그려지는 장면은 많은데 어떤 어휘를 사용해서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아서 참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글을 한 2년 정도 쓰고 나니 실력이 조금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든 생각은 '나만의 문체를 가지고 싶다'였다. 그렇게 또 몇 년을 더 쓰다 보니 나만의 문체가 생겼다. 이제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내 글이 돌아다닌다. 며칠 전, 내 글의 일부분이 캡처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즈음 드는 생각은 '나를 모르는 사람도 어딘가에서 내 글을 읽으면 좋겠다' 정도다.

6. 지나고 나면 전부 미화되고 만다. 우리는 참 단순하다. 죽일듯이 미웠던 사람도 지나고 보면 내가 왜 그토록 사람을 미워했나 싶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는다. 여름도 그렇다. 여름. 정말 더운 여름. 그래서일까. 그만큼 사연 생기기도, 미화되기도 쉬운 계절이 여름이지 않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우리는 한강에서 맥주나 한잔하며 여름을 추억할 것. 여름은 더워야 여름이다. 이제 시작이다. 레벨업을 위한 버닝 타임이다. 다들 파이팅! 이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