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거짓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거짓말. 1년을 넘게 탄 출퇴근길 시내버스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시내버스를 타면 유독 머리가 아프다. 고속버스나 지하철은 탔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시내버스만 타면 머리가 아프다. 버스에서 휴대폰은 보지 않는다. 머리가 더 아파지기 싫어서. 버스를 타면 화면은 잠시 끄고 창가를 멍하게 바라본다.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 이어폰을 귀에 끼운 채로 흘러가는 풍경을 본다. 사실, 풍경이라고 할 것도 없다. 건물과 간판뿐인 동네를 매일 같이 지나는 것이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거짓말 그러나 내가 창문으로 보는 것들은 절대 어제의 것과 같지 않다. 내가 앉은 자리의 위치,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공기와 빛, 때마다 다른 내 시선... 이렇게 엄청나게 사소하지만 다양한 요소들이 창밖을 다르게 하니까. 어제는 눈에 들어오던 식당이 오늘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1년 넘게 다닌 길에서 난생처음 보는 간판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게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일 수 있겠다.
퇴근길, 여느 날처럼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익숙하게 낮은 건물들. 그사이 체스 말처럼 놓인 가게 간판과 주인 모를 낡은 자전거, 정류장, 듬성듬성 초록을 두른 담벼락, 각종 현수막.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시야 밖으로 조금씩 붕괴하고 다시 새로운 창밖이 구성되는 과정.
마지막으로 정말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재생되는 것을 인지한 순간, 알 수 없는 익숙함이 순간 저릿했다. 기시감?
예지몽?
아니면 평행 세계의 나와의 연결?
방금 장면은 분명히 내 기억에 있는데.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를 방증한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이 노래와 함께 재생됐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거짓말 오감을 통해 과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닷가에 놀러 갈 때 나는 비릿한 부둣가 냄새로 고향을 기억하는 제주도 출신 친구. 모래 질감 슬라임을 왜 그렇게 사 모으냐고 물어보면 노을이 다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던 때가 생각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촌 동생. 설산을 보면 젊을 때 대학 동기들과 꼬박 반나절을 고생해서 올랐던 겨울의 설악산이 생각난다는 엄마. 그리고 뱀고기와 닭고기 맛이 비슷해서 닭 먹을 때 가끔 산에서 친구들이랑 뱀을 잡아먹던 게 생각난다는 아빠. 나에게는 노래가 그렇다. 난 한 번 플레이리스트를 정하면 1년 정도 반복 재생을 한다. 그 목록에 있는 노래 중 하나를 들으면 그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던 한 해가 떠오른다. 기억은 순간 반짝이고 다시 조금씩 흩어져가는 과정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만이 잔상으로 남는다. 잔상은 그때의 여름과 초가을을 가로질러 적당히 가벼운 반팔 차림의 내 어깨를 스치듯 두드린다. 그렇게 나는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거짓말 10년 전의 나는 학생이었다. 투박하고, 서툴고, 거칠고, 어리숙하고. 하여간 여기에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비슷한 단어는 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멋모르고 시작했던 짝사랑에는 정말 많은 감정이 함축돼 있는데, 그래서 같은 이야기도 백만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데,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해 주지 말아 달라는 한 가지 결말로 귀결된다. 저녁이었고, 여름답지 않게 선선했고, 곧 비가 내릴 듯 습했다. 그 이후로 나는 백만 가지 이야기를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고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때 당시 귀갓길과 지금의 퇴근길이 아주 잠깐 겹친다. 그리고 그 당시 들었던 노래가 여전히 내 휴대폰에 있다. 이게 퇴근길에 내가 느꼈던 저릿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때 찰나 동안 떠올랐던 건 기시감도, 예지몽도, 평행 세계의 나도 아니었다. 단지 잘라낸 것에 대한 환상통일 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거짓말 "있지도 않은 것이 아플 수 있나요?" 기초적인 의학 지식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과거 절단 장애 환자들이 환상통을 호소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란다. 마치 꾀병처럼 보인다는 저 의심 섞인 질문. 특히 절단된 시기가 오래됐을수록 의심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 역시도 나의 환상통이 꾀병에 불과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나에게 없는 게 아플 순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예기치 못한 채 내 의심은 산산조각이 날 때가 있다. 저릿함을 없애기 위해 통증 부위를 열심히 문질러 본다. '미련'이 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는 여전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제 그 이유가 이제는 시내버스가 아닐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