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은 남들과 다를 것 없었다. 아니 시작부터 조금 달랐나. 유난을 부리던 너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먼저 다가왔다. 나는 그런 네가 싫지 않았다.

인물 훤칠하고 깔끔한 사람이 나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가. 그보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말해야 하나. 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절여진 탓에 쉬라고 주는 휴일도 제대로 못 받아먹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주말 휴일인 경우에는 '알차다'보다는 '그럭저럭'에 가까운 하루를 보내곤 했었는데, 휴일이 평일에 등장하는 경우에는 어딘가 붕 뜨는 기분이 들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날도 그랬다.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눈을 뜨고, 커튼을 걷고, 아침을 대충 챙겨 먹으며 방을 적시는 햇살을 보니 나가고 싶어졌다. 인스타에서 스크랩해 둔 게시글을 둘러보며 '혼자 갈 만한 곳을 찾았다. 그날 간 곳은 시청역 인근에 위치한 카페. 사무실로 가득 찬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그 카페. 휴일인데도 직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내 꼴이 웃기기도 했다. 몇 주 동안 붙들고 있던 책을 끝까지 읽고 카페에서 나왔다. 소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땅을 바라보며 걷다가, 툭, 어라, 아이쿠, 그렇게 너를 만났다. 나는 커피를 들고 가던 너와 부딪혔다. 죄송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이 오가고 다시 걸어가려는데, 네가 나를 다시 불렀다.


저기요!

네?

아 죄송해요. 혹시 옷에 커피 묻으셨나요?

제가 세탁비 물어드릴게요...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 찌질했던 첫 만남. 너는 세탁비 받으려고 부른 게 아니라고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고, 대신 번호 좀 받을 수 있겠냐며 연락처를 받아 갔다. 너와 나는 이렇게 엮이게 되었다. 너는 시청에 살았고 나는 화곡에 살았다. 나는 시청역에 직장이 있었고, 너는 광화문에 직장이 있었다. 나보다 일찍 마치는 날이 잦았던 너는 늘 내 회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나 좋다는 사람이 나를 따라다니며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의심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도 그랬다. '광화문 회사원' 하면 딱 떠오르는, 멋들어진 정장에 사원증을 내건 모습으로 나를 환하게 반기는 너를 보면 우리 사이에 연인 같은 기류가 흐르곤 했다.

지루하고 반복적이던 내 인생에 특별 이벤트가 생긴 것 같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퇴근하고 만나서 맥주를 마셨고, 선선한 날이면 산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꽃다발을 내게 안겨 주며 우리 한번 만나 보자고 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사랑 이야기.


그런 너에게 애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가 만난 지 두 달이 조금 지났던 어느 날에 본 너의 휴대폰에는 디데이 어플이 돌아가고 있었다. 연인 사이에 디데이를 세는 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구백일 정도가 카운트되어 있는 그 창을 보고 한 번, '최근 추가된 항목'에 있는 소개팅 어플에 두 번, 억지웃음을 지으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너의 태도에 세 번. 그렇게 정신줄을 놓았다. 서울역을 나오면 보이는 메가커피. 그 건물을 끼고 우회전을 하면 보이는 한적한 길목. 서울역에서 그 길목까지 갈 동안 '휴대폰을 내놓으라'는 나와 '일단 진정하면 보여 준다'는 너의 공방전이 펼쳐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너는 뒤로 돌아 휴대폰을 터치하며 손을 빠르게 움직이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네 뺨을 때렸다. 너를 할퀴었다. 네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어서 말이 안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나를 달래 주는 네가 참 싫었다. 더러운 손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네 가식적인 모습이 역겨웠지만, 그런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도 참 미웠다. 혼자였던 내게 너는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댈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 아팠다. 도대체 섹스가 뭐길래 너는 다른 여자를 두고도 나를 만났던 것일까. 도대체 섹스가 뭐길래 두 여자를 한 번에 만나면서까지 소개팅 어플을 다운로드했던 것일까.


내가 다른 남자랑 잤다. 일종의 복수심이었나.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던데 내가 너를 만나기 위해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만나던 애인과 헤어졌다며 내게 나름의 '인증'을 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너도 나와 비슷한 아픔을 느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너를 사랑하려면 나도 더러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늘 공평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너의 휴대폰에 있던 그 소개팅 어플을 깔았다. 이름을 한 글자 바꾸고 나이를 한 살 줄였다. 취미란에는 해 본 적도 없는 '클라이밍'을 적었다. 만나고 싶은 상대란에는 '캐주얼하고 가벼운 만남'을 체크했다. 만남은 쉬웠다.

가장 빨리 매치된 남자와 그날 밤에 바로 만났다. 그 남자는 너보다 키가 작았고 몸은 좋았다. 키스는 하지 않았고 섹스는 '딱 한 번'만 했다. 남자가 씻으러 간 사이에 나는 모텔을 나왔다. 심장이 뛰었다. 이러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너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티를 내고 싶었다. 뭐든 끝장을 보고 싶었다. 내가 저지른 행동을 너도 감수하고 나를 만날 건지, 아니면 우리의 사랑이 끝이 나든지. 나는 네가 보란 듯이 휴대폰 알람을 켜놨다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둔 채로 너와 이야기하는데 어플 알람이 울리고, 너의 눈은 진동이 울리는 내 휴대폰으로 향하고,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보고. 그때 당황한 너의 눈빛은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너는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보라고 했고, 나는 다른 남자와 잤다고 말했다.

왜 그랬냐는 너의 질문에 나의 대답은 '그냥?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뺨을 맞고, 뺨을 때리고, 나보다 너의 눈물이 조금 더 빨랐고, 그 눈물을 보며 그래도 얘가 나를 사랑하기는 했나 보구나 하는 그런 감정이 들었다.

고래고래 지르는 내 목소리 사이를 파고드는 어플 알람 소리. '새롭게 매치된 친구를 확인해 볼까요?','저도 시청 근처인데 오늘 볼래요?, '어디 사세요?''저도 클라이밍 좋아하는데 '몇 살이세요?','FWB?' '씨발'과 비슷한 말을 내뱉은 너의 입 모양과 그 상황이 웃겨서 웃는 나.

우는 너. 웃다가 우는 나. 그만큼 정신없었던 순간이 또 있을까.


이제 어쩔 거냐는, 헤어질 거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서너 개비를 피우고서야 떨어진 너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서로 잘못 하나씩 했으니 이제 우리 사랑에 집중하자. 였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네 말이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서로 갈 데까지 갔고, 결혼할 사이는 아닌 거 같고, 그래서 그냥 재미 보는 정도로 만나고 싶은 걸까. 사랑에는 참 다양한 양상이 있다지만, 우리 사랑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있을까. 진짜 사랑인지 가짜 사랑인지 따질 때가 아니라, 사랑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져야 할 것만 같았다.

너는 왜 아직 나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너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사실 우리 사랑은 그리 특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그날 너와 길에서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날 연락처를 주는 대신에 너의 계좌번호를 받았더라면, 너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이럴 일도 없을 텐데. 결국 모든 원인의 화살촉은 나를 향했다. 다음 날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다. 너는 정장을 입고, 나는 타이트스커트를 입고. 너는 내 손톱자국을 가리려 흉터용 밴드를 사서 붙였고, 나는 휴대폰 액정이 왜 깨졌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술 먹고 굴렀어요.'라고 대답했다. 평소에는 술도 안 마시던 사람이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길래 몸을 못 가눌 때까지 술을 마시냐는 그 말은 조금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