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1일 차 입대를 하여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지금 시간은 3시 7분이고 생활관 안에 들어온 지는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며 몇몇은 책을 읽고 몇몇은 멍을 때리고 있다. 저 친구들은 어떤 기분일까. 나와 비슷한 기분이겠지.

아직까지 입대에 대한 실감이 확 나지는 않는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사회에서 실컷 논 것들이 생각나며 지금의 내 처지에 화가 난다.

앞으로 1년 반... 어떡하지?

끝나긴 할까?

2일 차 군대에서의 하룻밤이 지났다. 생활관 내부에 코를 고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잠을 설쳤다. 이런 곳에서 한 달 넘도록 버텨야 한다니 참 막막하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양치를 했는데도 7시 18분밖에 되지 않았다. 사회 음식으로 물들어져 군대 밥이 입에 맞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아니, 맛있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낭비되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쓸데없는 제식과 불필요한 행동들... 식사 한번 하려고 해도 무슨 준비 과정이 그렇게나 많은지. 여자친구가 보고 싶다. 아직까지 동기들과 통성명도 하지 못했는데 갑갑하다.

왜 다들 말을 안 하는 거지?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3일 차 이곳에서의 3일 차 아침이 밝았다. 지금 시간은 6시 16분이다. 어제도 코를 고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래도 이제 한 달 뒤면 잠시나마 여자친구를 볼 수 있다. 생활관 군데군데 적혀 있는 과거 훈련병들의 낙서(?)를 읽어 봤는데 재밌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수료일도 결국 오는구나, 라는 메모를 봤다. 그래.... 제발 와라 수료야... 그런데 오면 뭐 하냐... 그때부터 시작인데. 먼저 입대해서 지금 복무 중인 내 친구들도 이 과정을 다 겪었겠지.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미필을 보면 빵 터지는데 그 기분을 알 것 같다. 진짜 막막하네... 4일 차 이제 생활관 동기들과 말을 텄다. 다들 말 안 하고 있을 때는 내향적인 줄 알았는데 입을 여니까 모터를 달았는지 쉴 새 없이 떠들더라. 그러다 조교가 들어와서 뭐라뭐라 하길래 많이 떠들지도 못했다. 끌려왔는데 끌려온 사람들끼리 대화도 마음껏 못 나누네 참. 아직 훈련은 받지도 않았는데 솔직히 두렵지는 않다.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여자친구는 내가 써 주고 온 편지를 매일 읽고 있을까?

내일은 공강일 텐데 뭘 할까.... 보고 싶다. 그래도 여기 와서 사람들이랑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건데 말 좀 하니까 살 것 같다.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5일 차 오늘은 밥이 참 별로였다.

무슨 낙지김치죽?

이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밥이랍시고 나왔는데, 한 입 먹으니 덜 익은 반죽 맛 같은 게 나서 그대로 일어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대체 식비를 가지고 무엇을 하길래 음식을 이따위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밥이 맛없으니 예민해진다. 군대는 대체 왜 이렇게 비효율만을 추구하는가. 대기는 뭘 그렇게 많이 해야 하며, 불필요한 것들을 왜 이렇게 많이 해야 하는가. 아직까지 사회 물이 덜 빠졌나. 모르겠고 그냥 오늘 식비로 삼각김밥 사 먹는 게 훨씬 만족스럽겠다. 이딴 음식은 개밥으로 줘도 욕먹을 것 같다. 식단표도 안 알려 주니 진짜 미칠 지경이다. 6일 차 오늘은 보급품을 받았다. 더플백(?)이라고 하는 거대한 군대용 가방 두 개가 꽉 찰 정도로 보급받았다. 보급품이 산더미다... 이걸 군생활하는 내내 다 입기나 할까?

입으니까 줬겠지... 디지털 무늬 옷을 내가 직접 입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미치겠다. 벌써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다. 여자친구 보고 싶다. 샤워를 마치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재밌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한 방에 모아두니 이렇게 또 친해지는구만.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7일 차 여자친구와 전화를 했다. 처음에 무슨 수신할 수 없는 상대라고 떠서 당황했는데 다시 거니까 전화가 됐다. 목소리가 좀 안 좋아 보이던데 학교 동기들이랑 같이 있나 보다. 여자친구는 동기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애교를 안 부린다. 아무튼 오늘은 주말이라 그런가 뭘 시키지도 않고 좋구만...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한다는데 바빠지겠지. 근데 매 순간 분노하는 조교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분노하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도 분노를 한다. 화내려고 조교를 했나....

얘들은 왜 이러지??

8일 차 오늘은 처음으로 아침 점호도 제대로 하고 제식이랑 이것저것 제대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가도 배웠는데 전부 한 번쯤은 들어 본 것들이라 어색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이 군가도 자연스레 입에 붙겠지. 중간중간 무엇을 했는지 기록할 정신도 없을 정도로 바빴던 하루다. 여자친구가 참 보고 싶다. 누우면 잘 것 같다. 근데 불침번을 해야 한다...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9일 차 입대했다는 것이 확 실감 나면서 갑갑함이 느껴진다. 여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다. 이 경험이 분명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어제 불침번을 서느라 오늘 온종일 피곤했다. 한 시간 덜 자는 게 이렇게 클 줄이야. 스트레스 잔뜩이다. 피곤하고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다. 사회와 격리된 이곳은 정말 최악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가장 빛나는 젊음을 여기서 이렇게 낭비하고 있는 걸까. 더위를 먹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짜증이 난다. 사회 소식을 하나도 접할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교도소에서도 TV는 보게 해 준다던데... 10일 차 오늘은 처음으로 뜀걸음을 했다. 한 1km 정도 뛴 것 같은데 뜀걸음을 하고 나니까 좀 숨통이 트인다. 살면서 뛰어 본 적이 없어서 뜀걸음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적금을 들어야 한다고 해서 휴대폰을 불출 받았는데 인터넷이 잘 안 터져서 적금을 들지도 못했다. 이것도 참 답답하다. 훈련병이 잔뜩 모이면 휴대폰이 당연히 안 터지는 걸 모르나?

왜 굳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휴대폰을 줘서 이런 불상사를 만드는 거지. 진짜 일하는 꼴을 보면 답답하다. 입대하고서 시간 참 많이 지난 거 같았는데 아직 열흘밖에 안 지났다니... 크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11일 차 오늘은 비가 내려서 우의를 입고 총기 수업(?)을 듣고 왔다. 신기했다. 저 총기도 사람이 만든 것일 텐데...

어떻게 총알이 저렇게 나가게 만든 거지?

머지않아 직접 사격한다는데 기대가 된다. 날씨가 덥고 습하다. 어휴 바쁘다 바빠. 비까지 내려서 끈적끈적하다. 친구들도 보고 싶고 여자친구도 보고 싶다. 12일 차 오늘은 짬을 내서 여자친구와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계속 비가 쏟아져서 야외 활동이 없었다. 그래서 일기 쓸 게 없다.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나는 하루구나!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흐르는 듯하다. 13일 차 아 정말 바쁜 하루였다. 이제야 글을 쓴다. 지금 시간은 21시 05분이다...

내일 종교활동에서 맛난 것 좀 주면 좋겠다... 14일 차 젠장... 초코파이랑 콜라 준대서 불교 갔는데 천주교에서는 몽쉘이랑 카프리썬을 줬다더라... 아 진짜 미친듯이 억울하다. 사회에서는 돈만 주면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이렇게 구해야 한다니. 처량하기 짝이 없다. 자대 가면 PX에서 몽쉘이랑 초코파이 사서 쌓아 놓고 먹어야겠다.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15일 차 조교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새끼가 있다. 쟤들은 화를 내려고 조교를 하는 거냐?

훈련병들을 통솔하고 가르치는 데에 사명감이 있어서 조교를 하는 거냐?

편지는 대체 언제 받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네. 여자친구한테 인편이 왔는데 달랑 하나... 보고 싶구만... 16일 차 오늘 드디어 사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어제 여자친구한테서 인편 달랑 하나 왔다고 서운해했는데, 봉투에 가득 담긴 편지를 보고는 서운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나를 이렇게 기다려 주는 여자친구도 있는데 힘을 내서 버텨 보자!!! 17일 차 오늘은 총기를 처음으로 쏜 날이다. 실제 사격 전 연습 사격을 한 것이라는데, 살면서 총소리를 처음 들어 본 날이다. 총기 소음이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소리가 커서 놀랐다. 귀마개를 착용했는데도 소리가 무척 컸다. 반동도 상당했다. 진짜 군대에 온 것 같았다. 18일 차 야간 일과가 갑자기 생겨서 이제 모든 일과가 끝났다.

현재 시간은 22시 09분...

아 씻고 자야지.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19일 차 오늘은 인편이 안 왔다. 고장 났다고 하던데 말이 되나 이게?

여자친구 편지(종이 편지)를 받아서 읽어 보는데 내가 사 준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군대 오기 전에 큰맘 먹고 사 준 건데... 아깝구만 20일 차 까먹고 못 쓴 날! 21일 차 오늘은 종교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보니까 종교활동 미참석자들은 생활관에서 쉬게 해 주길래 나도 오늘은 생활관에서 쉬었다. 몽쉘 하나 먹으려고 몇 시간 수고하기 싫다. 22일 차 사격을 했다!!!! 만발 23일 차 피곤해서 못 썼다.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24일 차 각개전투를 했는데 팔꿈치 다 까졌다... 남자는 보호대 같은 거 안 찬다고 보호대도 안 사 왔는데 진짜 미련한 짓이 따로 없었다. 다들 보호대 같은 거 안 챙겨 올 줄 알았는데, 나 빼고 다 끼고 있었다. 무릎이랑 팔꿈치가 쓰라린데 다행히 생활관에 연고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발랐다. 샤워하는데 팔꿈치랑 무릎에 모래알이 박혀 있어서 놀랐다. 25일 차 유격 화생방을 한 번에... 미친 일정 쓰러지기 직전이다. 화생방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방독면 썼을 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고, 정화통을 뺐을 때는 그냥 후추 향기가 조금 났다. cs탄을 조금만 탔나 보다. 26일 차 아 여자친구 보고 싶다. 주요 훈련들은 대충 다 끝나서 여유롭다 이제!!!

얼른 끝마치고 싶다. 27일 차 오늘도 너무 피곤해서 종교활동에 가지 않았다. 여자친구와 전화도 했다. 내일은 행군을 한다. 빨리 훈련소를 떠나고 싶다.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28일 차 행군을 한다길래 긴장이 좀 되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별거 아니라서 시시했다. 과거 군대에서는 40km 이렇게 행군했다는데... 그건 진짜 빡셀 것 같다. 아무튼 이제 정말 웬만한 훈련은 다 끝났구만. 후련하고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29일 차 또 비야?

비가 너무너무 싫다.... 평생 볼 비 여기서 다 보는 것 같다. 자대 가면 이런 날씨에도 근무를 서고 일을 해야 할 텐데 어휴. 30일 차 왜 안 썼지?

31일 차 이제 곧 수료인데 솔직히 실감이 크게 나지도, 크게 기쁘지도, 크게 섭섭하지도 않다.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많지만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입대할 때보다 막막함이 크다. 이렇게 수료하고 자대에 가도 막내로 1년 반을 생활해야 하잖아?

선임들도 있는 거고?

하......


훈련소에서 쓴 서른네 번의 일기 32일 차 오늘은 머리를 정리했다. 수료를 한다고 분위기도 어수선하다. 다들 처음에 비해 많이 풀어졌다. 오늘은 '통일이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길래 썼는데....

통일이 왜 필요한가?

북한이 주적이라 군대에 왔는데 통일을 왜 해야 하나?

오늘은 내가 쓴 일기를 처음부터 읽어 봤다. 처음에는 거창하게 몇 줄이나 적었는데 갈수록 바빠진 일과 탓에 일기 분량이 줄어드는 꼴이.... 참 웃겼다. 내 군생활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33일 차 오늘은 수료하기 전날이라 참 바빴다. 예행연습도 하고 전달 사항도 이것저것 전파받느라 바빴던 하루다. 여자친구가 내게 마지막 인편을 안 썼다. 내일 잘 찾아오려나... 만나면 뱃살 좀 만져야겠다.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이제 소등을 했다. 내게도 수료가 오는구나!! 34일 차 지금 시간은 05시 43분이다. 수료식을 하는 날이라 그런지 기대가 돼서 일찍 눈이 떠졌다. 나도 생활관 구석에 메모 하나 남기고 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막막하지만 일단 오늘 잠시나마 여자친구를 보니까 그거 하나로 버텨야지.

훈련소에서의 일기도 이게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