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너의 소식을 접했다.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여러 기억과 함께 퇴적이라도 된 줄 알아서 한동안은 잊고 지냈건만, 너에 대한 기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내 삶의 한순간에는 너라는 사람이 머물다가 간적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꽤 반가웠다. 사람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대개 순간적이고 휘발성이 강하다. 때문에 얼굴 다시 못 볼 정도로 다툰 악연이 아니라면, 절연하고 사는 사람들을 돌이켜 볼 때 웬만큼 악감정이 남아 있는 경우 찾기란 어렵다. 반가운 마음이 커서 너의 지난 소식을 하나둘 찾다 보니 어딘가 깊숙이 잠들어 있던 너에 대한 혐오 감정에 불이 붙어 버렸다. 너는 말이다.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너무나도 컸다. 이미 일인 분의 몫은 거뜬히 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맡은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 된 지도 오래지만, 너는 아직도 스스로를 여리고 약한 존재로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네 삶의 실질적인 발전은 없는 게 분명했다.


알량한 인간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남들이 네게 건네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라든가 '연민 섞인 부러움' 따위를 아직도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따위 것들이 당신에게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깨달았으려나. 설마 아직도 그러한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서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것도 모자라 인생의 활력 혹은 동기 따위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왜, 너는 그런 것을 잘했다. 고고하고 깨어 있는 문학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기 일쑤였고, 잘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양,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 뭐라도 되는 양, 시대와 흐름을 헤집어 놓은 사이비 사상에 큰 이치와 힘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너의 일관되지 못한 그 모습이 참 우스웠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도래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그 사이비 사상들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설명하던 너는 정작 그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하고 세우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과정 없이 결과만 향유하며 누리는 권리가 당연한 호의인 양 행동하는 꼴이 참 보기 싫었다.


그래. 너는 그대로다. 너는 지금도 똑같다. 지금 이 나이를 먹도록 뭐 하나 제대로 준비한 것 하나 없으며, 그마저도 젊은 날의 경험이라 치부하며 낭비할 것이 뻔하다. 나이만 먹었지 생각하는 꼴이나 행동 따위에 변화 하나 없어서 어린이를 보는 듯한 감정도 든다. 너는 무언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집단 '전체'가 내는 성과에 너를 묻어가려는 모습이 강하게 보인다. 너는 아직도 혼자일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는 계속 그러한 발전 없고 생산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네가 제자리에 그대로인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읽었을 때의 네 반응이 궁금하다. 아니, 그려진다. 너는 내 예상을 빗겨나가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일부러 특정되는 것을 사전에 염두하고 명칭과 지칭을 바꾸었으나, 그러한 나의 뜻을 모르는 너는 '아, 내 이야기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회피할 것이 뻔하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인다.